Archive for 2012

autoportrait 자화상

2012년 12월 6일 목요일 § 0

autoportrait, acrylic on papaer (march or april 2012~not finished)
자화상, 종이에 아크릴 물감 (2012 아마도 3-4월경의 어느날 시작, 아직 안끝남)



  삼 년 전쯤인가 자화상이라며 데상으로 그렸던걸 지난 봄쯤에 조금 크게 그려서 물감칠을 해뒀었다. 배경은 아이디어가 생기면 해야지..하고 내버려뒀던거. 결국 아직도 그냥 한구석에 버려져있다. 타지에 혼자 뚝 떨어져 외국인으로 살아가다보니 내 처지가 이렇게 느껴질때가 있다. 항상 불안정한 상태로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는 느낌. 의지할 부모님과 어떤 얘기이든 들어주던 오래된 친구들이 옆에 없어서인지 밖에서 받는 모든 영향은 혼자서 모두 소화한다. 한국에 있었다면 친구와 술한잔 마시며 지나칠 법한 안좋은 기억들도 여러번 곱씹어 소화하려 노력한다. 지금 이 힘든 시간들 하나하나가 거름으로 쓰여 후일에 자양분으로 쓰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래도 너무 힘들때가 있다. 그럴땐 역시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책과 좋아하는 작가의 작업을 보는 게 최고.


오늘은 웹에서 발견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명언들과 얼마전 읽었던 조정옥씨의 '나무가 내게 가르쳐 준 것들'의 한 구절 '고독하라'가 내게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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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목표도, 어떤 체계도, 어떤 경향도 추구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강령도, 어떤 양식도, 어떤 방향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일관성이 없고, 충성심도 없고, 수동적이다.
나는 무규정적인 것을, 무제약적인 것을 좋아한다.
나는 끝없는 불확실성을 좋아한다.”

 “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믿음을 가져야 하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내적으로 몰입해야 합니다. 그것에 한번 사로잡히면, 당신은 결국 회화를 통해 인류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어느 정도 믿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열정이 없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경우, 그냥 포기하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이죠. 왜냐하면 회화는 철저하게 바보 같은 짓이니까요.”
-게르하르트 리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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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고독하라.

  그대 집 한 채, 나무 한 그루, 그 어떤 생명의 흔적도 없는 어떤 낯선
별에서 홀로 사흘 밤낮을 헤매다가, 보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한 남자를
만났다면 아마도 그대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그를 필사적으로 부둥켜안을
것이다.

  발 시린 늦가을 고독이 마구 밀려오면 그대는 길 위에서 만난 그 누구와도
차 한잔을 나누고 그대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대화를 하고 싶어질 것이다.

  문 바깥 층계를 오르내리는 낯선 이의 발자국 소리에 그대 영혼은 반가움과
환희로 가득 차 전율하게 되고 문을 열고 뛰쳐나가 그의 뒤를 슬그머니 밟고
싶어질 것이다.

  고독은 호두알같이 단단한 그대 영혼을 열리게 하고 무표정 한 그대 얼굴에
웃음을 헤프게 한다. 그대는 잘 발효된 포도주처럼 거친 맛이 제거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담게 된다.

  고독, 얕은 고독이 아니라 가슴에 사무치는 고독은 인간을 인간답게 해준다.
고독하라.
  고독의 품에 그대를 맘껏 내던져라.

salon ARBUSTES 2012

2012년 10월 14일 일요일 § 0

 croisement, acrylique 62x85cm 2012



 catalogue 2012

ma peinture dans la catalogue

2012년 9월 22일부터 30일까지 Mantes-la-jolie(멍뜨 라 졸리)의 Maison des associations AGORA에서 열린 beaux arts découverte (보자르 데꾸베르뜨) 의 2번째 살롱 arbustes에 참가하게 되었다. 자유 주제로 처음 접수를 받을때 croisement (교차:사진1)란 그림과 cheval(말과 소녀) 그림을 제출했었고 메일로 참여 자격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래서 어떤 그림을 낼지 고민하다가 좀 더 최근작인 첫번째 그림으로 결정 후 작업 사진과 이름, 테크닉, 가격등의 디테일을 적어서 우편으로 보냈었다. 그런데 주최측에서 착오가 있었나보다. 전시 개막식 당일에 카탈로그를 받아 펼쳐보니 그 안에는 croisement이 아니라 cheval 그림이 인쇄되어 있었다. 사실 나는 어느 그림을 걸어도 큰 상관은 없었는데(전시 주제가 따로 없었기에) 막상 걸려있는 그림 대신 엉뚱한 그림이 카탈로그에 인쇄되어 있다는 점에서 꽤나 실망스러웠다. 게다가 전시된 그림은 작업특성상 빛이 상당히 중요한데 (배경은 칠하지 않았고, 바지부분을 아크릴로 하얗게 칠했다.) 전시장의 조명이 썩 좋지 않아서 내가 표현하려던 것까지 잘 보이지 않아서 또 한번 안타까웠고 이런 점에서 프레젠테이션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하게 느꼈다.

그 밖에 내가 파리에서 늦장을 부리다가 참가자들과의 만남시간을 놓쳐서 너무 아쉬웠다. 여러지역에서 온 다양한 참가자들이 많았기에 좋은 정보교환의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J'ai participé au deuxième salon ARBUSTES de BEAUX ARTS DECOUVERTE qui a eu lieu du 22 au 30 septembre 2012 à AGORA, Maison des associations à Mantes-la-jolie. Comme c'était le sujet libre, j'avais envoyé deux photos de mes peintures, Croisement et Cheval puis j'ai été acceptée pour y participer. Mais on devait choisir une seule oeuvre pour l'exposition. Donc j'ai choisi "croisement" qui est plus récent que l'autre. Et j'ai renvoyé une description de peinture (Titre, date, technique, dimension, prix.. etc)
Au jour de vernissage j'ai découvert l'image de "cheval" avec la description pour "croisement" dans la catalogue. C'était une erreur assez déprimante pour moi. En fait, d'exposer la peinture "cheval", ce n'était pas un problème. Il n'y avait vraiment pas de préférence entre deux peinture (j'aime bien les deux) mais une peinture au mur et une autre peinture dans la catalogue avec une fausse description, cela m'a énormément déçu. En plus la lumière de la salle ne convenait pas très bien à ma peinture dont la partie de pantalon est peinte en blanc, et le fond est naturellement blanc de papier. (Je voulais jouer avec cette décalage assez subtile qu'il faut une bonne lumière pour bien remarquer.) Cela m'a fait encore penser à l'importance de la présentation.

Sinon, Ce qui était trop dommage pour moi, j'ai raté la réunion des participants qui a eu lieu juste une heure avant le vernissage. Cela serait très sympa comme occasion de rencontrer des jeunes artistes et faire la connaissance. Mais bon, j'étais en retard même au vernissage. Tant pis pour moi!

Catalogue de l'expo "Mémoires d'éléphants"

§ 0











고래 / 천명관 장편소설

2012년 8월 15일 수요일 § 0

고래 한 조각 2011




  작년 가을 2학년 1학기 첫 수업 때, 페인팅 교수님이 'A4'라는 주제를 준 적이 있다.
뭘 할까 망설이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고래 한 마리와 여자 한 명을 그렸었다.

  A0정도 크기 캔버스의 중심에 거꾸로 떨어지고 있는 금발의 여자를 그리고, 그 조금 위에 역시 추락하고 있는 고래 한 마리를 배치했다. 배경은 전부 하늘색이고 아랫쪽에는 조그맣게 에이포 용지 덩어리들 모양의 네모난 건물들을 그려넣었다.

  일주일짜리 과제였는데 6일 동안 고민하다 검사받기 전 날에야 캔버스에 붓을 댈 수 있었다. 하지만 크기가 크기인지라 스케치, 채색, 마무리까지 하는 데에 반나절로는 택도 없었다. 결국 검사 당일 날, 완성도도 없고 뭔가 상당히 애매한 그림을 내 놓게 되었다.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고 그 위에 실도 달고 이것저것 해봤지만 일단 내 마음에도 들지 않게 되어 버려서, 나는 내 차례가 오자마자 교수들 앞에서 '셀프 크리틱'을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있자니 내 작업을 잘 아는 한 교수가 슬그머니 내 편을 들어줬다. 너무 자신감 없어보이는 내가 안타까웠던 것 같다. 다른 교수에게 '이 아이는 작년에 꽤 큰 대회의 페인팅부문에서 상도 탔었고, 어떤 어떤 그림을 주로 그리고, 작업에 유머도 많이 들어있고 잘한다'는 식으로 얘기를 해 줬다. 프랑스 미술학교 학생들 스타일이 일단 무엇을 했든간에 '왜 했느냐' 하는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라 다들 결과물이 조금 구려도 '자기 변호'를 엄청나게 하는 편인데, 동양에서 온 이 쪼매난 여자애는 아시아 액센트가 섞인 불어로 실컷 셀프-어택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변호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나 보다.

  집에 오자마자 잔뜩 심술이 난 나는 그 그림을 가위로 16등분해 잘라버렸다. 교수님이 변호해 줄 때 더 울컥했던 거다. 난 어렸을 때 엄청난 울보였는데, 누가 위로하려 들면 "위로하지마. 그럼 더 운단 말이야." 하고 위로도 못하게 했다. 심지어 누가 안아주기라도 하면 끝도 없이 엉엉 울었다. 이제 엉엉 울기엔 나이를 조금 먹었으니 뭐라도 해야했다.

  그 이후, 16등분 되었던 그림 중 여자 부분은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라 사용되었지만, 고래는 제대로 완성도 안된채 눈 부분과 몸통 중간 부분 두 조각이 남았다. 버릴까하다가 연습장에 끼워두었다.



추락하는 여인 8조각 2011


  그렇게 약 1년이 흘렀고, 지인의 집 책꽂이에서 <고래>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천명관씨의 장편소설인 이 책은 제 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이었다. 은희경 씨 덕분에 문학동네소설상에는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데다가, 고래나 코끼리 같이 커다란 동물과 관련된 것들에 대해서는 그냥 못지나치는 나이기에 두툼한 책의 두께에도 불구하고 결국 집어들었다.

  이 책 속엔 다양한 형태의 '거대한 존재'들이 나온다. 고래, 코끼리, 덩치가 아주 큰 사람들. 이 들은 주로 아름답게 그리고 선망의 대상으로 표현되지만 극 중 모두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 금복이란 산골소녀가 바닷가의 한 도시로 내려와 처음으로 본 거대한 생명체, 장엄하고 아름다웠던 '고래'는 얼마뒤 부둣가에서 사내들의 칼로 해체되어 배에서 피와 내장을 잔뜩 쏟아내며 고깃덩어리로 변해버리고, 금복의 딸 춘희를 등에 태우고 마을을 두시간씩 산책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끌던 코끼리는 차 사고로 인해 긴 코에서 검붉은 피를 쿨렁쿨렁 쏟아내며 죽는다. 그리고 나중엔 금복의 주문에 의해 가죽만 벗겨내져 안에는 지푸라기만 잔뜩 들어있는 박제모형으로 변해 금복의 다방 앞 홍보 및 상징물로 쓰인다. 덩치 큰 사람들 : 금복의 첫사랑 걱정, 그의 딸 춘복, 춘복이 사랑하게 된 트럭 운전사 역시 모두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다. (사실 등장인물의 죽음에 대해 말하자면, 이 덩치 큰 세 사람을 제외하고도 모든 등장인물이 비극적으로 죽긴 한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은 그야말로 동물적이고 계산적이지 않은 순수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인간'이라기보다 고래나 코끼리와 다를 바 없는 순수한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고래나 코끼리의 이미지는 무언가 아득하고 슬픈 느낌을 지니고 있다. 각각 지상에서, 그리고 바다에서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위치했던 두 동물이지만 그보다 한 칸 위, 최정상에 서게 된 인간에 의해 멸종위기에 처해 버린 것 때문일까. 그 때문에 인간으로써 사라져가는 그들의 장엄한 아름다움에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일까.

  책 뒤 편의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질문자가 묻는다.
  "코끼리, 걱정, 고래, 춘희 등등. 이러한 사물이나 인물 들은 크다는 이유로 긍정적이고 의미있는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원시적인 활력, 원시적인 순수성에 대한 작가의 동경 때문이 아닌가"
  작가는 대답한다.
  "'큰 것에 대한 선망'에 대해 말하자면, 그런 동경보다도, 저는 오히려 그런 거대한 것의 비극성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아요. 거대한 육체가 덧없이 스러지고, 고래가 해체되어가고, 아까 제가 여학생 얘기도 했지만 거대한 육체 안에 깃든 비극성에 저는 더 이끌렸던 것 같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생명체가 크다는 것은 굉장히 비극적인 거죠. <원령공주>라는 일본 만화영화에 보면 무시무시하게 큰 동물들이 등장합니다. 그건 매우 아름답지만 그래서 더 비극적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상상력도 실은 매우 좁아지면서 세밀해지고 있는데 전 그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걸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 현대사회의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질서 속에서 거대한 정신과 그 아름다움이 스러져가는 데에 대한 애절함. 이 속엔 그런 게 있습니다."

  나는 평소 동물과 사람을 함께 그린 페인팅을 자주 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코끼리로 한 작업이 여러개 있다. 고래는 실제로 전체 모습을 본 적이 없어 그릴 엄두를 제대로 못내고, 시도를 해도 이내 실패하곤 했다. 하지만 고래 소리로 작업을 해보고 싶어 모아둔 사운드파일이 몇 개 있을 정도로 여전히 관심이 많다.
  한참 고래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보던 중에 흥미롭게 읽었던 칼럼을 링크해 둔다.

고래의 슬픈 노래 : http://www.freecolum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06
코끼리의 장례식 : http://www.freecolumn.co.kr/news/articleView.html?idxno=6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 은희경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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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보낸 혼란의 시기가 있었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만큼 사람이 변덕스럽고 바보같아지는 시기가 있을까? 난 이 시기에 참 바보 같았다. '그 사람과 나'의 관계에 대해 어떤 정의도 내릴 수 없는 상태였고, 그 사람도 나도 서로 호감이 있다는 정도 말고는 아무것도 확신이 없었기에 더 바보같이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평소 소심한 성격은 아닌데 이렇게 확신이 없는 경우에는 미친듯이 소심해진다. (어쩌면 내가 훨씬 많이 좋아한다고 생각했기에 조심스러웠던 것일수도 있다.) 그냥 작은 단서에도 잔뜩 설레여하지만 그 뿐이다. 내가 행동할 수 있는 권한 따위는 없다. 나의 소심함이 완벽하게 통제를 해주기에.

  그래서 매순간 보고싶어도 연락 한 통 할 수 없었다. 잡생각이 너무 많았기에 "할 수 없었던" 거다. 그런 내 자신이 너무 미웠다. 이 시기에 항상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 있다. "쿨하다. 이거." "쿨해보여요."
쿨해지고 싶었다. 그러면 내 감정도 맘껏 표현하고, 반응이 안좋아도 쿨하게 넘길수 있을테니까.
"이 사람은 아닌가? 별 수 없지 tant pis" 하고 말이다.

  그러던 중에 읽었던 책이다. 은희경 작가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사월 또는 오월의 어느 늦은 저녁이었다. 그 사람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안났다. 이전 번엔 이런 충동을 이기기 위해 영화를 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관계에서도 능동적인 역할이 되지 못하는데, 집에 가만히 앉아 노트북 모니터 속 영화 장면들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는 내 자신이 참 수동적이라 느껴졌고, 그 순간 영화보는 것도 참을 수 없이 지겨워졌다. 딴 생각도 자꾸 났고. 그래서 책을 집어들었다. 어려운 책은 집중이 안 될 것 같아 가벼운 사랑얘기를 읽고 싶었다. 제목과 첫 페이지를 읽었을 때의 느낌으로 '쉽게 읽힐 법한 연애소설 같다'해서 고른게 이 책이 었다. 예상대로 시간가는 줄 모르게 술술 읽히는 책이었지만 시간 때우기 용 그저그런 "연애소설" 느낌은 전혀 아니었다.

 이 책 속의 여주인공의 이름은 '진희'인데, 그녀는 참 쿨했다. 내가 되고 싶었던 '쿨한 여자'를 조금 지나친, 내 잣대로 평가하자면 과한 쿨함이었지만 그런 그녀의 성격이 극중 그녀를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처음 몇페이지를 읽자마자 지금의 나에게 힘과 도움이 되어줄 책이란 걸 느꼈다. 이 쿨한 여자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느끼고 조금만 더 쿨해지면 좋겠다 생각했다. 책을 다 읽어갈 수록 그런 생각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말이다.

  "쿨한 사람은 없다. 쿨한 척 하는 사람만 있을 뿐" 이란 말을 인터넷 서핑 중 어느 블로그에서 본 것 같다.
나는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아직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 진심으로 쿨하다고 할 만한 사람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완전히 반박할 수도 없다. 책을 읽다보니 쿨해보였던 진희도 결국 쿨한 척 하는 사람이었다.

  책 뒤편의 해설글 중 한 단락에선 주인공 '진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진희가 '보이고  싶어하는 나'는 애인이 많은  자유분방한 이혼녀, 남자를
쉽게 잊는 냉정한 여자, 육 년 동안이나 같이 산 남편과 이혼 수속을 마치고 와서도 보충수
업까지 하는 독한 여자, 사랑하면서도 헤어짐을 무릅쓰는 강한 여자이다. 그러나 진짜  나는
그리우면 몸을 던져 달려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다혈질의 여자,  올드 팝을 좋아하는 감상적
인 여자, 부딪쳐보기 전에 먼저 포기해버리는 비겁한 여자, 상처를 입으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빨리 대범한 척하는 소심한 여자이다. 이처럼 두 개로 분리된 그녀는 〈배트맨〉에 나오
는 조커 같다. 마스크를 벗으면 제 얼굴을 찾는 배트맨과는  달리 그는 화장을 해야 살색의
얼굴이 된다. 이런 조커의 최대 슬픔은 무표정해도 되는 배트맨과는 달리 자신의 비애를 감
추지 위해 웃기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울지 않기 위해 슬픔에 선수를 치면서 서둘
러 웃는다. 그래서 그의 웃음은 자주 일그러진다."

  난 원래 글을 자주 쓰던 사람이 아니기에, 책을 읽고 이 책은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는 건 너무 어렵게 느껴지고, 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내가 좋아했던 책을 읽은 뒤 한참 나중에야 알아챌 수 있는 '약간의 변화'에 대해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 이 소설을 읽은 이후 나는 '쿨해보여요.' '쿨하다.'라는 말의 사용을 거의 제로에 가깝게 줄였다. 아마 이 책이 내가 갖고 있던 쿨함에 대한 '동경'을 '동정'으로 바꾸어 놓지 않았나 싶다.
  쿨한 사람이 진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사랑은 너무 뜨겁다. 나도 함께 뜨거워질 각오를 하지 않고 쿨한 온도를 간직하려 든다면 사랑에 빠질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한 발자국 거리를 두려 들겠지.
  두번째 변화는 혼자 있을 때엔 술을 잘 마시지 않게 됐다. 기쁜 일이 생겨 맥주나 막걸리 한 캔으로 자축하는 정도를 제외하면, 힘든 일이 있을 때나 우울해서 마시고 싶을 때에도 혼자서는 꾹 참게 되었다. 이건 극 중에서 진희가 아이를 낙태시키고 애인과 헤어진 뒤 술을 사러가려다 마는 한 장면 때문이었다. 사실 책 읽는 내내 진희는 내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그렇지만 왜인지 모르게 이 부분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현석이 떠나버린 날 혼자서 술을 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했다. 꼭 그가 떠나서만도 아
니었다. 그 아이가 떠난 날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편의점으로 맥주를 사러 나가려고 의자에서 엉덩이를 뗀 순간 어떤 이유를 가지고
술을 마신다는 것이 더없이 약한 짓으로 생각되었다. 술이란 즐거울 때,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때 그냥 마시는 것이다. 슬프거나 괴로울 때 마시면  그것은 술이 아니라 슬픔과 괴로
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자기의 시간을 마시는 짓이다.  그래서 나는 도로 의자에 앉아
서 담배를 피웠다."

  책을 읽고나서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진희처럼 쿨하게 행동해볼까 하는 심산이었는지 몇 초 간의 고민도 없이 덜컥 통화버튼을 눌렀던 것 같은데, 역시 수화기 저편으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그냥 어버버 거리고 바보같은 말 몇마디 하다 끊었던 것 같다. 








Mémoires d'éléphants (expo, du 13 mars au 8 avril 2012)

2012년 3월 22일 목요일 § 0
















좋은 기회로 꽤 큰 프로젝트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다.
제목은 "코끼리의 추억". (자세한 설명은 카탈로그 첨부+번역에)
담당자에게 2011년 초 작업 "Sans titre(코끼리 배에 매달려 있는 여자)"그림을 제안했고, 701번째 아티스트로 참가했다.

(2012년 3월 13일부터 2012년 4월 8일까지 열린 이번 에디션에서는 "Pays de la Loire" 지역에 살거나 이곳에서 작업하는 아티스트들의 코끼리 작업 190점과 지역 공공 컬렉션과 "코끼리의 추억" 프로젝트 단체의 소장품을 전시한다.)


J'ai eu l'occasion de participer à un projet intitulé "Mémoires d'éléphants".
La peinture "Sans titre (une femme suspendue sous un éléphant)" (2011) était ma proposition puis je l'ai présenté à titre de la 701ème artiste.


(Du 13 Mars au 8 avril 2012, dans cette édition, il y a190 oeuvres provenants d'artistes vivant ou travaillant dans la Région des Pays de la Loire, mais aussi des collections publiques de la Région et de l'association Mémoires d'éléphants.)


참조 lien : http://jpsidolle.free.fr/

Nello, Patrasche et du pain européen 네로와 파트라슈 그리고 빵

2012년 2월 27일 월요일 § 0

 어렸을 때 "플란더스의 개" 같은 유럽배경의 만화들을 보면서, 항상 등장하는 "빵"이 너무 먹고 싶었었다. 그땐 정말 너무너무너무 먹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넬로가 눈물을 흘리며 딱딱한 빵을 먹는 슬픈 장면을 보면서도 저건 무슨맛일까 궁금해 했었다. 근데 막상 직접 프랑스땅에 발을 디디고 그런 빵을 처음 먹었을때, 그런 것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별 생각 없이 먹었던 것 같다. 그런 감정을 찾고 싶다. 빵이 아니라 다른것에서.

Quand j'étais toute petite, je regardais des bandes dessinés que l'histoire se déroulait en Europe comme "A Dog of Flanders". Là, j'avais toujours envie de manger du PAIN européen parce que cela n'existait pas en Corée. 
Maintenant je suis en Europe, je mange souvent du pain mais je n'ai jamais pensé à ce que combien de fois j'ai désiré goûter du pain européen. Méme si ce désir de mon enfance était tellement fort.
Je veux bien trouver un sentiment comme ce désir-là, cela doit être une sensation très forte. Pas du pain mais quelque chose de bien.



http://en.wikipedia.org/wiki/A_Dog_of_Flanders

앤트워프의 대성당을 방문한 적이 있지만, 만화속에서 네로가 루벤스의 그림을 보며 죽어간 곳이 이곳이라는 것 역시 있고 있었다.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네로와 파트라슈를 떠올리며 그림을 보고 싶다.

J'ai déjà visité la cathédral d'Antwerp en Belgique, mais j'avais aussi oublié la scène où Néllo mourrait en regardent la peinture de Rubens "The Elevation of the Cross". Si j'aurais l'occasion d'y retourner, je songerai à Nello et Patrasche en regardant la peinture.

Georges Bataille "Histoire de l'oeil" 조르주 바타유 - 눈 이야기

2012년 2월 23일 목요일 § 0


  파솔리니의 영화 "살로 소돔의 120일"을 봤을 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난 꽤 비위가 강한 사람인가 보다. 책을 많이 읽은 편은 아니지만 내가 여태까지 읽은 책중 가장 에로틱하고 변태적인 내용이었는데도 끝까지 읽은 걸 보면 말이다.

  처음 이 책을 읽고자 결심한 건 1학년 미술역사 수업 때 교수님이 이 저자의 이름을 몇 번 언급했기 때문인데, 무슨 내용에서 나왔는지는 기억도 나질 않는다. 어쨌든 이름을 기억해두고 있다가, 도서관의 정신•의학 서적 쪽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제대로 된 리뷰를 쓰려면 두어번 더 읽어봐야 할 것 같은데, 그럴 용기는 안난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다면, 루이 브뉴엘과 살바도르 달리의 단편 영화 "안달루시안의 개"에서 면도칼로 눈을 자르는 장면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나에게는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강렬한 장면이었고, 나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와 같은 장면이 이 소설 속에 있었다. (나는 면도칼과 같은 종류의 날카로운 것만 보면 그 장면을 떠올린다.) 소설 출판년도가 1928년 이고, 안달루시안 개가 1929년에 만들어졌으므로 이 책에서 그 장면을 따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확실치 않다. 어쨌거나 조르주 바타유는 초현실작가들과 어울려 다니며 저술활동을 펼쳤다고 하니, 구지 누가 먼저였는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은 2장으로 구성되는데, 1장이 13파트로 책의 90퍼센트를 구성하고, 2장은 몇페이지 분량의 짧은 글이 적혀있다. 2장에서 말하길, 실제로 저자의 아버지는 매독환자에 맹인이었고, 어머니는 우울증을 앓고 정신착란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런 극도로 불안한 가정환경을 혐오했다고 나와있다. 이 마지막 장에서 독자들은 1장에서 반복, 강조되는 "눈" 이라는 요소와 여러 강박적인 요소들이 그의 아버지와 그의 삶 자체에서 끌어져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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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이야기〉
〈눈 이야기〉는 1926년 바타유가 프랑스 작가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정신분석을 받고 난 후 '더 개방적이고 글을 더 잘 쓸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빠져 탈고한 첫 장편소설이다. 무(無)와 불결함 그리고 외설스러움에 대한 근본적인 갈망을 담은 이 소설 은 어쩌면 매우 강도가 높은 성(性) 입문의 이야기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러나 무시무시한 쾌락에 탐닉하는 화자와 시몬, 마르셸의 현기증나는 체험을 통해 바타유가 드러내고자 하 는 것은 인간의 내면 깊숙이 드러워진 강박에 다름아니다. 작가 자신 불우한 어린 시절에 생겨난, 뿌리깊은 강박. 바타유의 모든 저작에 등장하는 강박적인 요소들(성(聖), 에로티즘, 죽음, 불가능)은 이 작품을 통해 자유롭게 비약하기 시작한다. ·
제1장 이야기 : 1. 고양이의 눈 - 열여섯 살의 화자는 시몬을 만난다. 그들 은 함께 성적 유희에 탐닉하고, 자신들이 몰던 자동차에 치여 죽은 한 소녀를 바라보며 쾌 감을 느낀다.
2. 노르망디의 장롱 - 그들은 내성적이고 순진하며 독실한 마르셸을 자신들의 유희에 끌어들인다. 시몬은 '엉덩이로 달걀을 깨는 기벽'을 갖게 되고, 샴페인을 마신 마르 셸은 성적(性的) 경련을 일으키지만, 청소년들의 부모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쫓아내는 바람 에 화자는 그 순간을 이용할 수가 없다.
3. 마르셸의 냄새 - 화자는 시몬 집으로 피신한다. 파티가 끝난 뒤 요양원에 갇힌 마르셸 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힌 시몬과 화자는 마르셸 없이는 사랑을 나누지 않기로 한다.
4. 태 양의 흑점 - 그들은 요양원에 가지만 친구를 탈출시킬 수가 없다. 하지만 창문 뒤에 서 있 던 마르셸은 잔디밭에서 자위행위를 하는 시몬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한다.
5. 핏줄기 - 그 들은 시몬 집으로 돌아간다.
6. 시몬 - 그들은 여기서 6주 동안 머무른다. 그리고 그 동안 마르셀을 어떻게 해야 될지 상상하며 달걀을 가지고 논다.
7. 마르셸 - 결국 요양원에서 도 망치는 데 성공한 마르셸은 '단두대의 신부인 추기경'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해달라고 그들 에게 부탁하는데, 이 추기경이란 파티를 하던 도중에 그녀가 스스로 틀어박혀 있던 장롱에 서 그녀를 끄집어낸 화자에 대한 흐릿한 기억에 다름아니다.
8. 죽은 여자의 떠 있는 눈 - 화자의 집에 온 마르셸은 목을 맨다.
9. 음란한 동물들 - 다음날 화자와 시몬은 스페인으로 가서 영국인 백만장자인 에드먼드 경을 만난다.
10. 그라네로의 눈 ∼ 11. 세비야의 태양 아래서 - 에드먼드 경은 두 사람을 투우 경기장에 데려가고, 투우 경기가 벌어지는 동안 시몬은 황소의 생불알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한다. 그녀는 이 불알을 가지고 성적 유희를 벌 임으로써 마르셸의 이미지를 되살린다.
12. 시몬의 고해와 에드먼드 경의 미사 - 세비야의 한 성당에서 시몬은 고해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녀는 고해신부의 목을 졸라 죽인다.
13. 파리의 다리들 - 시몬은 고해신부의 눈알을 파내서 황소불알을 그렇게 했던 것처럼 엉덩 이 사이에 집어넣고 논다. 제2장 일치들 : 저자는 앞의 이야기를 해석하면서 아버지의 실명(失明)과 어머니가 목 매단 일을 회상한다.
〈눈 이야기〉에서 그려지는 모든 것들은 바로 그 시절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개인사적으로, 나아가 사회적으로 동요와 폭력의 시대에 태어난 이 작품에는 니체적 비 관론이 짙게 깔려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들은 1957년 출판된 〈하늘의 푸른 빛〉에서 좀더 과격하고 선명한 형태로 변주된다.
출처 : 눈 이야기 - 조루주 바타유|작성자 물과꿈의 글검색

김영하 "빛의 제국"

2012년 2월 21일 화요일 § 0



  읽고 난 뒤에 여운이 좀 컸다.
  고작 2년 반. 한국에서 13시간 걸리는 먼 나라에 혼자 뚝 떨어져 지낸 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상황은 완전히 다르지만, 소설 속 주인공인 북한에서 교육받아 남파된 '기영'은 "이방인"이라는 점에서 외국 유학생의 삶과도 꽤 잘 맞아 떨어진다.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처음 읽었을 때, 주인공이 나와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뭔가 좀 씁쓸했던 기억이 있는데, "빛의 제국"을 읽을 때에도 뭔가 비슷한 종류의 감정을 느꼈다. 책은 참 좋았지만 마음이 참 싱숭생숭하다.

 책의 표지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선택한 것에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낮의 밝고 푸른 하늘에 대조적으로 말도 안되게 어두운 대지의 풍경. 마치 소설을 읽고 그에 맞춰 주문된 일러스트 이미지 처럼 소설의 분위기를 깔끔하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매미하고 슬프다이. 나는 매미하고 슬프다이."
  철수는 할머니가 유난히 매미의 울음을 무서워한다고 생각해왔었다. 그러나 사실은 가여워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문법은 틀려도, 아니 어쩌면 틀렸기 때문에 더더욱 할머니의 슬픔이 손실 없이 철수의 심장으로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것은 슬픔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비통한 것이어서 어린 철수는 그것의 무게를 몸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정말 할머니의 슬픔이 감자 자루처럼 어깨와 등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그는 어서 아버지가 내려와 자기를 데려가주기를 기도하며 잠이 들었다.


  221페이지, 철수의 할아버지가 죽었을 때 할머니가 슬퍼하는 대목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대목이 제일 와닿았던 부분이었다.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에서 "설렁탕을 사왔는데 왜 먹지를 못해.." 라고 말하던 부분 이후로, 그만큼 슬퍼하는 이의 감정을 강하게 전달하는 표현을 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그 대목을 읽을 때 만큼의 진한 여운을 느꼈고, 이 "매미하고 슬프다이"하는 표현에서 형성되는 청각적이며 시적인 어떤 분위기는 참 묘하면서 짠하고, 또 아름답게 느껴졌다.

"À la couleur" Jan Voss

2012년 2월 15일 수요일 § 0


최근에 도서관에서 빌려본 책 중 하나.
Jan voss 라는 아티스트의 에세이 "À la couleur"이다.
다양한 주제의 짧막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의 아뜰리에 사진이라던가 그의 작업들도 볼 수 있어 시간 날 때 틈틈히 읽기에 좋았다.

사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책 곳곳에 그려져 있는 아기자기한 낙서들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아티스트 데이비드 슈링글리도 떠오르고, 이런 그림은 무슨 생각으로 그릴까 하는 궁금증도 생기고 해서 바로 집어 들었다. (책을 다 읽고보니 그는 데이비드 슈링글리와는 매우 다른 스타일의 작업을 한다.)

책 또는 웹서치에서 알게 된 몇가지 사실은, 그가 현대 미술사에서 꽤 잘 알려진 아티스트라는 점. 1936년도에 함부르그에서 태어나 현재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파리의 현대미술관에서 1978년에 이미 회고 전시도 가졌었다는 것. 그리고 1987년부터 1992년까지는 파리의 국립미술학교 에꼴 나쇼날 슈페리에흐 데 보자르에서 교수직으로 있었다는 점이다.

미술을 공부 하는 사람으로서 또는 페인팅을 하는 사람으로서 아티스트의 글을 읽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다. 게다가 이 작가가 독일에서 태어나 나중에 불어를 배운 사람이었기 때문인지 문장구조가 참 단순해서 외국인 또는 불어 초심자들이 읽기에 무리가 없어 보인다.
책 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불어 실력이 완벽하지 않을 때를 회상하며 그때의 불완전성을 약간은 그리워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데 이 대목은 공감이 정말 많이 갔다. 나에게 불어는 아직도 상당히 불분명한 느낌이지만 그래도 처음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와 비교하면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얇은 비닐 천막으로 가려진 세상을 부유하다가, 조금씩 조금씩 천막을 벗겨내고 현실을 마주하는 느낌이랄까. 사실 안개낀 세상속의 생활은 불편하기도 하겠지만, 개인의 차이에 따라 맑게 개인 날보다 훨씬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다.

  그 밖에 작가의 독특한 사고방식 및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점 역시 볼 수 있는 몇가지 일화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작가가 일본에 갔을 때 신발을 벗어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발을 "이성 유혹의 수단"이라고 생각해 왔던 그에게 신발을 벗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작가는 양말을 신고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그의 친구들의 권유에 못이겨 신발을 벗고 실내로 들어오게 된다. 발가벗겨진 듯한 그의 심정과는 다르게 친구들은 그의 발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는 안도감과 함께 어떤 실망감을 느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두번째로 첨부한 사진속의 텍스트는 정말 귀엽다고 느꼈는데, 책 분위기 자체가 이런 분위기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이 글은 글을 읽고 텍스트 옆의 이미지를 바라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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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사진 속 텍스트.


"Reproche"
Quelque chose de bizarre en rentrant, comme une présence. Mais il n'y a personne  évidemment. Comment d'ailleurs quelqu'un aurait-il pu entrer? Je me mets à inspecter les lieux plus attentivement. Sur la table, des crayons éparpillés, des feuilles de papier de différents formats entassées par petits tas séparés, des pots de yaourt sevrant de récipients d'eau, des pinceaux et autres outils, non, vraiment rien à signaler. Mais si, il y a une minuscule trace brillante, là, comme celle d'un petit escargot. Elle va de la pointe d'un pinceau vers une aquarelle que j'ai abandonnée cet après-midi. La ligne, un peu hésitante et ondulante, s'arrête sur la petite feuille et je vois que deux yeux me regardent avec reproche.

"비난"
  무언가 이상한 것이 들어오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곳엔 당연히 아무도 없다. 그래, 누가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겠는가? 나는 이 장소들을 좀 더 조심스럽게 검사하기 시작한다. 테이블 위, 흩어져있는 크레용들, 작은 무더기로 분리되어있는 다양한 포맷의 종이장들, 물통처럼 쓰이던 요거트 그릇들, 여러자루의 붓, 그 밖의 도구들. 음 아니야. 역시 눈에 띄는 특별한 것은 없다. 아, 여기 뭔가 있다. 여기 이 빛나는 작은 자국, 작은 달팽이의 자국같은 것. 그것은 붓의 끝부분에서 내가 오늘 오후에 아무렇게나 내버려둔 수채화를 향해 가고 있다. 약간은 망설이는 듯한 구불구불한 이 선, 이는 어떤 작은 종이 위에 멈춘다. 그리고는 나를 비난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위의 사진을 보세요.




Sophie Calle "Les aveugles"/ 소피칼 "맹인들"

2012년 2월 11일 토요일 § 0

Sophie Calle
"Les aveugles"
Beau livre (broché). Paru en 11/2011
79 euro



  최근에 몇가지 일을 보러 나왔다가 다음 약속시간까지 1시간이 남았던 날이 있다.
그 날, 시간을 때우러 서점에 갔었다. 요즘엔 항상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던 터라 꽤 오랜만의 서점 방문이었다. 2층에서 새로나온 음반들을 조금 둘러보다가 이내 예술서적 코너로 걸어갔다. 마침 신간란에 소피 칼(Sophie calle)의 Les aveugles(맹인들)이란 책이 있었다. 얼마전의 그녀의 오래된 책 중 하나인 Les histoires vraies 를 읽었기도 하고, 형광 노란색의 깔끔한 책 표지가 정말 예쁘기도 해서 바로 집어들었다.

  책은 세 가지 질문에 따른 테마로 나뉘어 있었다. 처음 부분에선, 선천적으로 시각장애를 갖고 태어나 한번도 세상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당신에게 아름다움이란"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걸로 시작되었던 것 같다. 질문과 함께 첫 페이지가 시작되고, 맹인들의 포트레이트, 그리고 그들의 대답, 그들의 대답을 소피칼이 사진으로 표현한 것들이 차례로 이어진다. 각각의 파트는 점자로 새겨진 페이지가 추가되어 맹인들 역시 읽을 수 있게 제본되어 있었다.
두번째 파트는 나중에 시력을 잃은 후천성 시각장애인들에게 "마지막으로 본 가장 아름다웠던 것"을 물어봤던 것 같다. 이 역시 위와 같은 방식으로, 사진과 글, 점자로 번역된 페이지로 구성된다.
세번째는 유명한 아트작품의 크리틱을 읽게하고 그 작업에 대해 상상하거나 느낀 것이었던가. 세번째 파트를 읽기 시작한 지 조금 뒤 핸드폰이 울렸다. 벌써 약속시간 10분 전 이었다. 아쉽지만 바로 책을 덮고 서둘러 약속장소로 가야했기 때문에, 세번째 파트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마음만 같아서는 책을 사들고 서점을 나서고 싶었지만, 책 가격이 79유로였다. 한국돈으로 12만원정도이다. 솔직히 그 만큼의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느꼈지만, 학생으로선 당연히 망설여지는 가격이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사두고 싶다.

아쉬운 마음을 다잡고 서점을 나섰지만, 손끝에는 점자책의 점자를 만지던 느낌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듯했다. 나는 점자를 읽는 법은 모르지만, 책의 3분의2 정도를 읽는 내내 점자를 읽듯 책을 더듬더듬 만지며 읽어보았다. 그들의 인터뷰 내용을 본따 소피칼이 찍은 사진들 역시 트래싱지에 인쇄되어 있어서 그런지 만질 때에 약간의 질감이 느껴졌다. 잘은 모르겠지만 책 안에 온통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이 책 안의 작업들은 '맹인들'이라는 제목으로 몇차례 전시 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쉽게 자료를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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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과는 무관한 내용이지만, 점자에 대해 찾아보다가 재미있는 광고영상을 발견했다.
햄버거 빵 위에 붙어있는 깨들을 점자모양으로 붙혀서 구웠는데 이는 시각장애인들도 자신이 먹는 음식을 알고 먹을 권리가 있다는데서 아이디어가 나온 것 같다. 다들 점자 글을 읽고 환한 미소를 짓는데 그 모습이 참 아름다워보였다.


이웃집 아티스트 mon voisin l'artiste

2012년 2월 5일 일요일 § 0

   내가 살고 있는 건물엔 아티스트가 두명이나 살고 있다. 아니 나까지 하면
세명으로 쳐야겠다.

  사실 나는 이웃과 자주 왕래하는 편은 아니다. 요즘 세상 자체도 왠지 그런 분위기가 아닐뿐더러, 내가 유독 개인장소는 공유하는 편이 아니라 더 그렇게 되어 버렸다. 오죽하면 낭트에 1년 반 사는 동안 사람들을 집에 초대한 게 단 한번. 내 생일파티때 뿐이다. 우리집에서 3분 거리에 사는 환희언니는 지인중에 그나마 제일 많이 우리집에 왔는데, 그래도 열번이 안넘을 거다.

  어쨌든, 나는 2층에 살고 있고 오늘 얘기하려고 하는 이웃집 아티스트는 1층에 살고있다. 그의 이름은 manu. 언젠가부터 건물 마당에 페인트 묻은 물건들이나 신기한 물건들이 조금씩 보이는 가 싶더니, 그가 나타났다. 여름이면 그의 집 현관문은 자주 열려있어 지나다닐 때 어쩔수 없이 내부를 보게되어있었다. 아 집을 참 어지럽게도 해놓고 사는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우리가 서로 처음 마주친 날, 그는 자신을 아티스트라고 소개했고, 나는 나를 미술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그는 자기 작업을 보여주며 자신은 "art brut"를 한다고 말했다.

  구지 분류하자면 나는 구상화를 한다. 구상화는 추상화의 반댓말이라고 하면 쉽게 설명이 될 것 같다. 그리고 마뉘는 추상화를 한다. 추상화는 상상의 여지도 많이 남겨주고, 참 흥미로운 스타일인 것은 확실하다. 보는이의 경험에 따라 정말 다양한 관람의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하고. 하지만 아직 나는 추상화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아마 내가 순수하게 색깔과 형태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을 찾는 스타일이라기보다 내 그림을 통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고, 그것을 남들이 이해해줬으면 하는 면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이렇게 주절주절 얘기하지만 사실 스타일은 언제 바뀔지 모르는 것 중 하나다. 마뉘가 처음에 구상화로 미술을 시작했듯이.

  솔직히 추상화 아트 거장들의 그림들을 수도없이 봐왔지만, 거기에서 강렬한 감동이라던가 하는 것을 받아본 적은 별로 없었다. (아, 예외적으로 피에르 술라쥬의 회고전은 정말 좋았다.) 하지만, 마뉘의 그림은 꽤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가 쓰는 색의 배합이라던지, 한쪽 표면은 무언가에 긁힌 것 처럼 거칠게 표현하고 한쪽표면은 부드럽게 하는 등의 다양함을 주는 테크닉등도 재미있었다. 한 예로, 노란물감으로 거칠게 표현된 부분은 사막의 모래를, 코발트블루 색깔의 부드러운 부분은 밤하늘을 연상시켜 밤의 사막 풍경을 나타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그림(사진1)이 있다. 또 어느 그림은 파도치는 하얀 물결과 분홍빛 바위, 분홍빛 숲을 연상시키기도 한다.(사진1) 밝은 연둣빛과 검정색의 조합(사진2)은 그림을 어느 방향으로 감상해도 그 나름의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나는 위의 그림을 통해 아름답고 어두운 바다를 떠올렸다.

  사실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그의 삶과 그의 작업들의 관계였다.
어떤 얘기를 하다가 내가 샤를르 보들레르의(charles baudelaire) 책 "인공 천국(les paradis artificiels)"얘기를 꺼냈었다. 이는 시인이 시적 창작과 마약에 관계에 대해 적은 에세이다.
마뉘는, 인공천국은 인공이 아니라 진짜다. 라고 했다.
아마도 그는 그 진짜세계를 그리기 위해 취해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자신의 그림을 소개하는 중에도 마뉘는 럼을 마시고 있었다.



photo1
 

  Dans mon immeuble il y a deux artistes, non, trois si on m'inclue.

  En fait, je ne suis pas quelqu'un qui fréquente beaucoup mes voisins. Peut-être à cause de l'ambiance du monde actuel, j'ai du mal à partager mon espace privé. Il n'y a qu'une seule fois où j'ai invité des gens chez moi, c'est à mon anniversaire. Fany qui habite tout près de chez moi, est la personne qui est la plus souvent venue chez moi. Mais même pour elle, le nombre de visites ne dépasse pas dix.

  J'habite au premier étage et mon voisin l'artiste dont je vais vous parler, habite au rez de chaussée. Depuis un moment, je voyais des objets bizarres ou des pots de peinture dans la cour de l'immeuble.
L'été dernier, il lassait sa porte d'entrée ouverte, donc j'étais un peu obligée de regarder à l'intérieur de chez lui.
Je me disais "je ne sais pas qui habite ici mais c'est vraiment le bazar"

  Le premier jour où l'on s'est rencontrés, il s'est présenté comme artiste et moi, comme étudiante de beaux-arts. C'est alors que Manu, c'est son prénom, m'a proposé de regarder ses travaux artistiques. Il m'a expliqué qu'il faisait "art brut".

  Si l'on devait distinguer nos styles de travaux, moi je fais plus de l'art figuratif. Pour expliquer très facilement, l'art figuratif est le contraire de l'art abstrait, Manu fait de l'abstrait. C'est un style très intéressant, cela donne beaucoup de possibilités pour l'imagination des spectateurs. Mais je n'ai pas envie de faire de l'abstrait peut-être parce que je ne sais pas comment le faire. J'ai plutôt envie de raconter quelques choses à travers mes peintures aux spectateurs. Alors que le but de l'art abstrait est plutôt de trouver la beauté dans la forme et la couleur. Mais le style est quelque chose de très facile à changer, donc peut-être que dans l'avenir j'évoluerais vers l'art abstrait. Au départ, Manu aussi faisait de l'art figuratif.

  J'ai vu pas mal d'oeuvres abstraites, mais Je n'ai pas forcément eu une grande émotion à les regarder.
(par contre, j'aimais bien l'exposition rétrospective de Pierre soulage.) Cependant, en ce qui concerne les travaux de Manu je les trouve intéressant. L'ensemble des couleurs qu'il combine, la technique qu'il utilise, donne une grande diversité à la surface de ses toiles. L'assortiment de coups de pinceaux très rêches à des coups de pinceaux plus doux, me font penser à un paysage de nuit dans le désert avec ces couleurs en or et bleu cobalt (photo1). Une autre peinture contient une forme carré de couleur blanche, qui me fait penser à la mer qui ondule. Des formes roses autour de la masse blanche composent une forêt d'arbres et de roches (photo1). Une peinture d'un ensemble de couleurs noire et verte claire, donne une multitude d'interprétations (photo2). Cela peut devenir une mer noire et un ciel vert clair ou le contraire un ciel noir et une mer verte claire. En tout cas, pour moi, c'était une mer très sombre.

Ce qui est le plus intéressant, c'était le lien entre ses travaux artistiques et sa vie. Nous en avons discuté plus d'une heure. A un moment donné, j'ai parlé du livre qui s'appelle "les paradis artificiels" de Charles baudelaire. C'est un essai où le poète traite de la relation entre les drogues et la création poétique. Là, Manu m'a dit  "les paradis artificiels ne sont pas artificiels, ils sont réels et existent vraiment."
Etait-il ivre pour mieux peindre, s'approchant ainsi des paradis artificiels qui lui semblaient bien réels.
Manu buvait même du rum pendant qu'il me présentait ses peintures.

LE RÉEL EST INADMISSIBLE -DʼAILLEURS IL NʼEXISTE PAS

2012년 1월 26일 목요일 § 0


전시회장 앞에 붙어있던 전시 포스터 -그림은 philippe cognée
Hab galerie 입구, 퐁피두 1층에 있는 서점처럼 한쪽에서 전시 카탈로그와 아트북들이 판매되고 있다.
Hangar à bananes, 동그란 원들은 Daniel Buren의 설치작업 Les Anneaux de Buren



12월 초에 학교메일로 한 전시회 베르니사주 초대 메일을 받았었다.

전시회 제목은 Le réel est inadmissible - d'ailleurs il n'existe pas
"용인될 수 없는 현실 -더구나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도로 해석될 것 같다.
2011년 12월 3일부터 2012년 2월 5일까지 Hangar à bananes 의 Hab Galerie에서 열린 전시이고,
이 프로젝트를 위해 다섯 국가의 아티스트들이 모였다.
Darren Almond(영국), Marc Bauer(스위스), Philippe Cognée(프랑스), Eberhard Havekost(독일), Jim Jarmusch(미국).

사실 Jim jarmusch(짐 자무시)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감독이다. 그래서 더욱더 '이 전시는 놓치지 말아야지..'라고 마음먹었던 건데, 아쉽게도 전시관에서 상영되고 있던 영화는 내가 예전에 이미 본 The limits of control(2009)이었다. 그리고 내가 도착했을 땐 한창 영화의
중간부분이 나오고 있었으므로 과감히 패스했다.

전시회장에 오기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아티스트는 짐 자무시 말고도 필립 꼬녜(Philippe Cognée)가 있었다. 내가 내 페인팅 작업을 교수님들께 보여줬을 때, 한 교수님이 참고할 만한 아티스트로 언급한 적이 있었고, 같은 학교인 호암오빠 역시 그의 한 작업(La foule)을 추천해 주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번은 미술에 대해 문외한인 한 프랑스인 친구가 우연히 아트채널에서 필립 꼬녜의 작업과 작업방식을 본 뒤, 그런 느낌이 참 좋은거 같다며 나도 살짝 그런 느낌을 따라해 보는건 어떻겠냐고 말한적도 있었다. 이렇게 세명씩이나 같은 아티스트를 추천해 주니, 참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어 인터넷을 통해 그의 작업들을 보게 되었다. 페인팅을 한 후 그 위에 플라스틱 필름을 놓고 다리미로 다려서 흐린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그의 작업방식은 참신하면서도 재미있었고 그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들도 꽤 흥미로웠다. 그리하여 참 그에 대한 기대가 참 많았는데, 아쉽게도 이번 전시에서 내 맘에 쏙 들어오는 그림은 없었다.
(참고로, 필립 꼬녜는 우리학교(에꼴 데 보자르 드 낭뜨)를 졸업했고, 2004년도 마르셀 뒤샹 상을 받았다. 그리고 최근 전시목록을 보니 2007년 2008년 서울의 Johyun gallery에서도 전시를 했던 기록이 있다.)

이 전시에서 내가 새롭게 발견한 아티스트는 Eberhard Havekost 였다. (에버하드 하베코스트? 독일이름은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프랑스 식으로 읽으면 '에베하흐 아베코스트' 정도인데.. 다음에 독일인을 만나게 되면 물어봐야겠다.)
일단 아티스트에 대해 조금 설명하자면, 1967년에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현재 베를린에 거주중이고, 그의 작업은 모마 컬렉션이나, 덴버 아트 뮤지엄, 테이트 뮤지엄에도 전시중이라고 한다. 그는 주로 TV나 비디오, 잡지, 카탈로그 등의 사진이나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들을 기본 소스로 이용한 페인팅들을 한다고 하는데, 이번에 전시된 작업들만 해도 바로 그런 점들을 느낄 수 있다. 유화작품들이 여러점 있었는데, 흐린 숲의 이미지같은 페인팅들도 있었고, 부서진 차를 그린 그림들도 있었다. 부서진 차들의 이미지는 플래쉬가 터진듯한 느낌의 빛표현이라던가 앵글이라던가 모든게 다큐멘터리 사진같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작품은 superstar 2 라고 이름붙여진 높이 2미터 넓이 4미터의 거대한 페인팅이었다. 사실 왜 좋았던 지는 잘 모르겠지만, 4미터를 왔다갔다 하며, 또 몇발자욱 뒤로 물러나며 계속 계속 바라보게 하는 그림이었다. 또한 왼쪽구석에 있는 작고 뜬금없는 이미지는 이 작품의 미스테리함을 극대화시키는 듯하다.
나는'전시회의 주제와 참 잘 어울리는 그림이네' 하고 생각했다.
용인되지 않는, 게다가 존재하지도 않는 현실.
설명은 못하겠지만 그냥 느껴졌다.

그리고 전시회장에서 전시 가이드 봉사를 하고있던 친구 마리안을 만났다.
나는 말했다.
-나쁘지 않네, 느낌은 알겠는데 뭔가 어렵다.
마리안이 대답했다.
-응, 이 전시는 설명을 듣고봐야 더 재밌는 것 같아.
그리고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었다.

역시 작가들의 의도와 작업설명을 듣고 작업을 보면 더 이해하기 쉽고, 더 흥미롭다.
하지만, 굳이 설명까지 듣지 않고도 보는 이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작업들은 항상 있다.
나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작가가 되고 싶다.



(아, Darren Almond의 비디오도 기억에 남았는데, Bearing이라는 35분길이의 비디오는 어떤 동양 남자가 산을 올라가면서 짐 같은걸 나르는 것을 셀프카메라 형식으로 찍은 것이었다. 그 사람의 몸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클로즈업된 그의 얼굴과 그 뒤로 산의 풍경과 하늘 등이 보였다. 그것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는 어깨에 뭔가를 짊어지고 산을 오르고 내리는 중이었고, 차림새나 표정에서 유추하건대 그것은 그의 오래된 직업같았다. 고된 노동으로 힘든 그의 표정과 거친 숨소리, 그리고 뒤로 보이는 안개낀 산의 환상적인 풍경의 조화는 참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나는 비디오를 다 보지 못하고 30분정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35분동안 오로지 그의 고통스러운 표정(그렇지만 딱히 인상을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을 보는것은 마치 나도 그의 노동에 동참하는 듯이 고통스러운 느낌이었기 때문이리라. (걷고있는 그의 몸에 고정된 카메라의 영상이기에, 마구 흔들리는 영상을 오랫동안 보는것 자체가 엄청나게 힘든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바로 옆쪽에 A라는 이름의 비디오가 있었는데, 사실 이미지가 지루해보여 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Bearing을 보는 내내 A의 배경음악이 들려왔다. Lyle perkins의 음악이라고 적혀있었는데 이 음악은 bearing의 영상과도 꽤 잘 어울렸다고 생각했다. A는 같은 작가의 2002년 작품,  Bearing은 2007년작 작품인데, 개인적으로 이 두 작업을 소리가 섞이게 배치한 것에서 큐레이터의 센스가 느껴졌다.)


전시회장 이미지
http://www.esba-nantes.fr/ACTU/SEM195/HTML/

불어판 보도 자료 다운로드
www.esba-nantes.fr/ACTU/SEM192/DP.pdf

Eberhard Havekost의 superstar 2 상세정보
http://www.artnet.com/ag/fineartdetail.asp?wid=425153915&gid=0

le samedi 21 janvier 2012, à Nantes

2012년 1월 21일 토요일 § 0

photo by me
  보고싶은 전시도 있었고, 강바람이 쐬고 싶어지기도 해서 오후에 잠깐 외출을 했다. 그저께부터인가 날씨가 풀려서 낮에 오랫동안 걸으니 조금 덥기까지 해서 차가운 강바람이 더 기분좋게 느껴졌다. 길에서 우연히 병원아뜰리에에서 만났던 여자아이를 만났다. 키도 크고 날씬해서 인상적인 이미지에, 내 아뜰리에에 정말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어서 내가 그 아이를 간호사라고 착각한적도 있었던 아이다. 그 아이가 그때 기억을 un bon moment de rigolade (웃고 장난치던 좋은 순간)이라고 말해주어 기분이 참 좋았다. 조금은 어색하게 또는 풋풋하게 대화를 하고 헤어졌는데, 아쉬운 느낌이 들면서도 내 얼굴에 자꾸 미소가 번졌다. 혼자 걷고 있었기에 웃으며 걸으면 미친 여자처럼 보일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애써 참으려고 했지만 그게 또 생각보다 쉽지 않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터 지금까지를 되돌아보면, 나는 참 망설임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
내가 호감을 느끼는 상대에게(이성이던 동성이던 항상) 대범하게 다가가거나 말을 하거나 하는 행동은 해 본적이 별로 없다. 그에 비해 운은 참 좋았다. 나중이지만 그 사람들이 나에게 다가와 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상황은 똑같다. 내가 그 사람과 있을때에 혹시나 어떤 나의 행동이 그 사람을 실망시킬까, 그리하여 처음의 나에 대한 호감마저 사라질까 두려워 항상 긴장하고 있고, 뭔가 망설이다가 타이밍을 놓치게 된다.
  오늘 만난 아이도 사실 너무 알고싶고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이어서 "커피 한잔 할래?"라던가 연락처를 물어보던가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냥 무언가 쓸데없는 걱정들이 내 입술을 꼭 다물게 만들고, 항상 그랬듯 "아 그럼 안녕, 잘가"라고 말해버리게 만들었다.

Une traversée de buffalo - 버팔로 횡단

2012년 1월 20일 금요일 § 0






  그저께 저녁 6시쯤, LU에서 한 공연을 봤다.
제목은 "버팔로 횡단", 공연장에 들어서니 무대위에는 커다란 스크린이 있고 그 양 옆으로 두명의 중년 남자가 서있었다. 왼쪽에 서 있는 남자는 바이올리니스트였는데 검정색 긴 생머리의 마른 체구였고, 오른쪽엔 백발의 배가 남산만하게 나온 소설가가 서있었다.
공연이 시작하고, 백발의 남자는 악보받침대 같이 생긴 것에 고정된 아이패드를 보며
자신의 글을 감칠맛 나게 읽어나갔고, 중간 중간 생머리의 남자가 여러가지 실험적인 방식으로 바이올린을 켰다.

  소설가가 읽는 글의 내용은 그가 횡단했던 미국의 버팔로라는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의 작은 도시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2010년 초 렌트카를 타고 그곳에 방문했는데, 넓게 펼쳐진 버팔로 도시에서 길을 잃었었다. 그 때 그는 그 곳에서 미국 대 호수들의 공업적, 사회적인 수많은 이야기들이 무한하게 병렬되어 나타나는 것을 느꼈고, 퀘벡으로 돌아왔을 때 이 도시를 Google Earth에서 찾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는 위성사진을 보며 그 안에서 또 한번 길을 잃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위성사진들은 우리가 실제로는 접근할수도 없는 금지된 장소들로도 접근할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러한 이미지들은 실제로 우리가 도시를 바라보는 비젼과는 상당히 달랐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그는 이 작업을 시작하였고, Google earth에서 본 위성사진들을 가상의 이야기들과 연결시킴으로써 판타지를 생성하고 새로운 도시를 구성하고자 하였다.

단순한 낭독이라기보단 속삭임, 외침 등의 연극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있던 열정적인 리딩. 공연 중 때때로 재생되던 도시의 여러가지 작은 소음들. 연주되었다기보다 뭔가 말을 하고자 하는 듯했던 바이올린의 소리들. 이 모든게 절묘하게 어우러져 나는 잠시동안 나만의 환상의 도시를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 느낌은 작년 여름 파리에서 la maison rouge의 기획전시 "My Winnipeg"를 볼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그 전시 또한 한 도시에 대한 것이자, 그 도시의 아티스트들의 작업에 초점이 맞춰있었는데 그 때에 받은 신비한 느낌은 아직도 생생할 정도로 강렬하다. 내 관점에서 이번 공연은 그 전시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그런 신비한 느낌의 기억을 되새기게 한 자체로 나에겐 의미가 있었다.
만약 흠이 있었냐고 한다면, 스크린에 나오는 이미지를 십분에 한번쯤? 바이올린 연주자가 직접 설정을 바꾸느라 뭔가 작고 잦은 끊김들이 있었다. 그런 작은 단절들은 공연을 통해 다른 세상을 여행하던 나를 한순간에 다시 현실세계로 돌려놓고, 그 단절들이 잦아짐에 따라 그것은 성가심으로 변해 공연을 지루하게 느끼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한번 디테일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된다. 더욱이 이렇게 관객들을 다른 세계로 푹 빠뜨리는 공연이라면 말이다.

참조 키워드-
LABO UTILE LITTERATURE
SEQUENCE "CITES ET FRONTIERES, PARCS ET PAYSAGES"
MERCREDI 18 JANVIER 2012 A 18H30
유용한 문학 연구소
시퀀스 "도시와 국경, 공원과 풍경들"
2012년 1월 18일 수요일 오후6시30분 


PERFORMANCE / LECTURE
"UNE TRAVERSEE DE BUFFALO"
AVEC FRANÇOIS BON- TEXTE, VOIX
ET DOMINIQUE PIFARELY- VIOLON, TRAITEMENT NUMERIQUE
퍼포먼스/낭독
"버팔로 횡단"
프랑소와 봉 -텍스트, 목소리
도미니끄 피파흘리- 바이올린, 디지털 이미지,음향 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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