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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말, 니체의 말

2015년 6월 16일 화요일 § 0



  머리가 복잡하면 유독 거실에서 멍 때리고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 같다. 평소에 워낙 조울증을 기본으로 장착하고 사는 사람이라, 내가 우울한건지 스트레스를 받는건지 몸이 안좋은건지도 구분하기 힘들때가 있다.
  요새 메르스 때문에 다들 걱정이 많다. 그래서 아버지는 혹여나 하는 마음에 할머니가 밖에 못 나가시도록 하고 있다. 할머니는 워낙 돌아다니시는 걸 좋아하시는 편이라 집에만 계시는 걸 너무나 답답해하셔서 내가 집에 있는 날이면 싱글벙글하시며 "뭐 먹고 싶니? 너라도 있으면 말동무가 되니까 좋다"고 하셨다.
  나는 가끔 주변 친구들에게 고민상담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을 때, 할머니께 조언을 구한다. 친구에게 먼저 물어봐서 해결이 안될 때나, 친구에게 물어봤자 답이 안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고민은 결국엔 할머니께 얘기하는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적기 뭣하니 그냥 넘어가고, 어떤 사람에 대한 질문이었다. 일단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얘기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보이는 그 사람에 대한 내용. 그런 내용들로 인해 마음속으로 강하게 흔들리는 나에 대한 질문.

  할머니는 아주 명쾌하게 대답하셨다.
  "넘(남)의 말 들을 필요 없어."
  "너랑 말이 잘 통하고 진실한 사람이 최고인거야."

  그리고 조금 뒤에
  "변덕 있는 사람이 사람도 잘 사귀는 법이야.
나는 변덕이 없어서 항상 어딜가도 사람을 잘 못 사귀었지."

첫 대답을 듣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너무 시원시원해서 였다.
진작에 할머니께 물어볼 것을 끙끙 앓고 있었던 것 같다.

할머니와 기분 좋게 냉면을 말아먹고, 책이나 한 권 읽으려 꺼내든 게 <니체의 말> 이었다.

나는 사실 얼마전까지 계속 기독교인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반종교적인 성향을 지닌 니체에 대해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단순하게 내가 가진 니힐리즘의 이미지와 결부시키며 막연하게 어두운 느낌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읽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던터에 돌아돌아 니체의 책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사버린 책이 '니체의 말'이었다. 사실 입문서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명언집이라고 해야할까. 그 정도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한 페이지마다 한가지 주제의 길지 않은 내용들이 적혀져 있고, 자신, 기쁨, 삶, 마음, 친구, 세상, 인간, 사랑, 지성, 아름다움이라는 열가지 큰 챕터로 구성되어있다.
책을 느리게 읽는 편인데도 단숨에 반을 넘게 읽어버릴 정도로 명쾌하게 쓰여진 글들이었다.

니체가 이런 말투를 가진 사람인지 몰랐다. 고작 명언집 200페이지 읽은게 다 이기때문에 섣불리 짐작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이제야 니체의 책을 살 용기가 들었다.

그 중에 90번 말이 앞서 할머니가 나에게 해주신 충고와 더해지면서 꽤 와닿았다.

90. 겉모습에 속지마라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진정 도덕적이라 단언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단순히 도덕에 복종하고 있는 것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스스로는 아무런 생각도 판단도 하지 않고 세상에 대한 체면 때문에 단순히 따르고 있거나, 자만심에 차 그 같이 행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기력감에 체념한 상태일 수도 있고, 다른 사고나 행동은 성가시다는 생각에 도덕적인 행동을 '그저'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도덕적인 행위 그 자체가 진정 도덕적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요컨대 도덕은 그 행위만으로는 진짜인지 아닌지를 좀처럼 판단할 수 없다.

내가 같이 보내는 시간동안 알게 된 그 사람에게 집중해야 하는 것이지, 잠깐 겪은 다른 사람의 안경을 통해 봐서는 안된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문구 같았달까.

사람들은 어떤 답을 찾으려고 책을 읽는다는 말이 있다. 평소 명언집 같은건 좋아하지도 않을 뿐더러 사본 적도 없는데, 자기가 찾는 답을 (그것도 내 마음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수 있는 답변) 빠르게 찾아내기에는 명언집 만한 것도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