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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2016년 1월 3일 일요일 § 0

2015년을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 가운데"로 마무리 했다면,
그리고 2016년 1월1일 첫 소설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으로 시작했다.

"생의 한 가운데"를 읽으며 매 페이지, 많은 구절 속 니나 부슈만의 감성이 너무 깊이 와닿아서 페이지들을 메모하는게 나중에는 의미가 없어질 정도였는데, 운좋게도(?) 베르테르의 감성도 많은 부분 공감이 되어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제일 인상깊었던 두 세 페이지는 얼마전 내가 친구와 벌인 논쟁과도 비슷한 어조였기에 옮겨둔다.





- 도대체 인간은 어째서 자살과 같은 우를 범하는지 모르겠소. 나는 자살이란 건 생각만 해도 역겹다오.
- 어떻게 당신과 같은 사람들은 그렇게 어떤 일에 대해 어리석다, 현명하다, 좋다, 나쁘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겁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결국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미리 어떤 행위의 내면적인 경위를 조사라도 해봤단 말입니까? 어떤 행위가 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그 원인을 확실히 설명해 보일 수가 있느냐 말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쉽게 판단을 내리지는 못할 겁니다.
- 아니, 설사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해도 절대로 용서하기 힘든 행위가 있다는 건 당신도 인정하겠지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그 말에 수긍했다네.
- 하지만 말입니다, 알베르트. 그 경우에도 약간의 예외는 있습니다. 도둑질이 죄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견디기 힘든 굶주림에서 자기 자신이나 가족을 구하려고 도둑질을 한 자는 동정해야 할까요, 형벌에 처해야 할까요? 분노에 사로잡혀 부정한 아내와 비열한 정부를 죽이는 남편을 향해, 또 사랑의 기쁨에 자신을 잊고 끝없는 사랑의 희열에 몸을 맡긴 소녀를 향해 누가 먼저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냉엄한 법률조차도, 냉정한 현학자조차도 감동한 나머지 벌하기를 주저하지 않을까요?
- 그것과 이것은 별개의 문제요. 자신의 정열에 사로잡혀 사리 분별을 잃은 인간이란 술주정뱅이나 미친놈과 같으니 말이오.
- 아아, 당신은 무척 이성적이군요.
나는 냉소를 띠며 대답했다네.
- 정열, 도취, 광기. 그러나 당신은 태연과 무감동으로 시치미를 뗄 수 있는 거로군요. 당신과 같은 도덕가들은 술주정뱅이를 비난하고 광인에게 돌을 던지며, 수도승처럼 점잔 뺀 얼굴로 그들을 지나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처럼 그러한 무리에 끼리 않은 것을 감사하지요. 나는 여러 번 술에 취하기도 했고, 내 정열은 결코 광기에 먼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후회하고 있지는 않아요. 뭔가 대단한 일, 뭔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이루어낸 비범한 사람들이 모두 예부터 술주정뱅이다, 광인이다 하고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나는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눈가가 자유로운 사고를 갖고 정도에서 벗어난 일을 하기 시작하면 제정신이 아니다, 얼간이다 하며 소문을 퍼뜨리는데, 차마 들어줄 수가 없군요. 무감동한 당신들, 영리한 당신들도 조금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 이것 보시오, 그것이 또 당신의 망상이라는 것이오. - 하고 알베르트가 말하더군.
- 당신은 무엇이나 과장하는 버릇이 있소. 적어도 지금과 같은 경우, 문제의 자살을 훌륭한 행위와 비교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소? 어쨌든 자살은 나약하다는 증거요. 고통스런 인생에 의연히 대처하기보다 죽어버리는 것이 훨씬 편할 테니까.
  나는 논쟁을 그만두려고 생각했다네. 이쪽은 진심으로 얘기를 하고 있는데, 하잘것없는 상투적인 문구로 상대를 해오니 대화가 될 리가 없지. 그러나 지금까지도 몇 번인가 그런 의견을 들었었고, 그것에 대해 화를 낸 일도 여러 번 있기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조에 다소 힘을 주어서 대답했지.
- 나약하다고요? 부탁이니 제발 외관에 구애받지 마십시오. 폭군의 무자비한 압박 속에서 허덕이던 국민이 분연히 일어나 쇠사슬을 끊었다면 당신은 이걸 보고 약하다고 하겠습니까? 집이 불길에 휩싸인 걸 보고 갑자기 몸 속의 힘이 분기해서, 보통 때 같으면 도저히 들 수 없을 무거운 짐을 너끈히 운반해내는 사람이라든지, 뜻밖의 모욕에 화가 치솟아 자기보다 힘센 상대를 순식간에 해치우는 그런 사람 역시 약한 것이 됩니까? 이봐요, 노력이 강인함이라면 어째서 과도의 긴장이 그 반대가 되는 겁니까?
 알베르트는 나를 바라보았다네.
- 당신이 드는 예는 이 경우에 조금도 해당되지 않는 것 같군요.
- 그럴지도 모르지요. 내 사고방식은 때로 터무니없다고 사람들로부터 자주 지적받으니까요. 즐거워야 할 인생이 무거운 짐이 되어 내던져 버릴 결심을 하는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지 한번 말해봅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공감하는 것에서만 어떤 사항을 논할 자격이 있으니까요. 인간의 본성에는 한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괴로움이든 어느 한도까지는 참을 수 있지만, 그것을 넘으면 인간은 바로 파멸해버리지요. 때문에 이 경우는 강한가 약한가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괴로움의 한도를 견딜 수 있는가 아닌가가 문제인 것입니다. -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말이죠. 그래서 나는 자살하는 사람을 비겁하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상한 논리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 대단한 역설이군요. - 하고 알베르트가 외쳤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네.
- 결코 지나친 역설이 아닙니다. 자, 보세요. 병 때문에 몸은 앙상해지고 정력이 다 소진되어 더는 일을 할 수 없는 데다, 아무리 좋은 치료를 받아도 생명의 순조로운 회복을 기대할 수 없게 된 경우, 이것은 죽을병이라고 해야 마땅하다는 건 당신도 인정하겠지요. 자, 이것을 정신에 적용해봅시다. 마음이 오그라들고 사물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해지고, 어떤 관념이 들어앉아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인간의 정열이 점차로 커져가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분별력이 뿌리채 뽑혀 파멸해가는 그런 인간이 있습니다. 침착하고 이성적인 사람은 그런 불행한 인간의 상태를 자세히 보고, 무언가 충고를 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건강한 사람이 병자가 누워 있는 옆에 서 있어봤자 자신의 넘쳐나는 힘을 손톱만큼이라도 나누어줄 수가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