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익숙한 것들(trop familier)'전 오프닝파티 사진

2017년 4월 24일 월요일 § 0


































'너무 익숙한 것들(trop familier)'전 오프닝 파티 사진입니다.
본 전시는 기획 단계부터 작품 제작과 전시까지 저와 페코타 코리아의 협업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전시는 2017.3.4.~4.15일까지 약 40일의 기간 동안 진행되었으며,
오프닝 파티는 2017.3.4.토요일 저녁 7시30분부터 연희동 Pekota Korea 본사에서 열렸습니다.

많은 분들이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셨습니다.^^
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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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anks to

전시 기간 동안 비디오 작품으로 전시를 빛내 준 작가 Benoit Baudinat, Fany Lee,
오프닝 파티 케이터링을 진행해 주신 망원동 Boulangerie Copain의 이우영 사장님,
전시 컨셉에 맞춰 멋진 즉석 연주를 들려주신 재즈 뮤지션 분들,
기획 단계부터 전시 마감까지 물심양면 힘써주신 Pekota korea 대표님,
전시 준비 기간동안 저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가장 많이 고민했던 Pekota korea 최선인 디자이너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2016년 1월 3일 일요일 § 0

2015년을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 가운데"로 마무리 했다면,
그리고 2016년 1월1일 첫 소설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으로 시작했다.

"생의 한 가운데"를 읽으며 매 페이지, 많은 구절 속 니나 부슈만의 감성이 너무 깊이 와닿아서 페이지들을 메모하는게 나중에는 의미가 없어질 정도였는데, 운좋게도(?) 베르테르의 감성도 많은 부분 공감이 되어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제일 인상깊었던 두 세 페이지는 얼마전 내가 친구와 벌인 논쟁과도 비슷한 어조였기에 옮겨둔다.





- 도대체 인간은 어째서 자살과 같은 우를 범하는지 모르겠소. 나는 자살이란 건 생각만 해도 역겹다오.
- 어떻게 당신과 같은 사람들은 그렇게 어떤 일에 대해 어리석다, 현명하다, 좋다, 나쁘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겁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결국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미리 어떤 행위의 내면적인 경위를 조사라도 해봤단 말입니까? 어떤 행위가 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그 원인을 확실히 설명해 보일 수가 있느냐 말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쉽게 판단을 내리지는 못할 겁니다.
- 아니, 설사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해도 절대로 용서하기 힘든 행위가 있다는 건 당신도 인정하겠지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그 말에 수긍했다네.
- 하지만 말입니다, 알베르트. 그 경우에도 약간의 예외는 있습니다. 도둑질이 죄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견디기 힘든 굶주림에서 자기 자신이나 가족을 구하려고 도둑질을 한 자는 동정해야 할까요, 형벌에 처해야 할까요? 분노에 사로잡혀 부정한 아내와 비열한 정부를 죽이는 남편을 향해, 또 사랑의 기쁨에 자신을 잊고 끝없는 사랑의 희열에 몸을 맡긴 소녀를 향해 누가 먼저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냉엄한 법률조차도, 냉정한 현학자조차도 감동한 나머지 벌하기를 주저하지 않을까요?
- 그것과 이것은 별개의 문제요. 자신의 정열에 사로잡혀 사리 분별을 잃은 인간이란 술주정뱅이나 미친놈과 같으니 말이오.
- 아아, 당신은 무척 이성적이군요.
나는 냉소를 띠며 대답했다네.
- 정열, 도취, 광기. 그러나 당신은 태연과 무감동으로 시치미를 뗄 수 있는 거로군요. 당신과 같은 도덕가들은 술주정뱅이를 비난하고 광인에게 돌을 던지며, 수도승처럼 점잔 뺀 얼굴로 그들을 지나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처럼 그러한 무리에 끼리 않은 것을 감사하지요. 나는 여러 번 술에 취하기도 했고, 내 정열은 결코 광기에 먼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후회하고 있지는 않아요. 뭔가 대단한 일, 뭔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이루어낸 비범한 사람들이 모두 예부터 술주정뱅이다, 광인이다 하고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나는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눈가가 자유로운 사고를 갖고 정도에서 벗어난 일을 하기 시작하면 제정신이 아니다, 얼간이다 하며 소문을 퍼뜨리는데, 차마 들어줄 수가 없군요. 무감동한 당신들, 영리한 당신들도 조금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 이것 보시오, 그것이 또 당신의 망상이라는 것이오. - 하고 알베르트가 말하더군.
- 당신은 무엇이나 과장하는 버릇이 있소. 적어도 지금과 같은 경우, 문제의 자살을 훌륭한 행위와 비교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소? 어쨌든 자살은 나약하다는 증거요. 고통스런 인생에 의연히 대처하기보다 죽어버리는 것이 훨씬 편할 테니까.
  나는 논쟁을 그만두려고 생각했다네. 이쪽은 진심으로 얘기를 하고 있는데, 하잘것없는 상투적인 문구로 상대를 해오니 대화가 될 리가 없지. 그러나 지금까지도 몇 번인가 그런 의견을 들었었고, 그것에 대해 화를 낸 일도 여러 번 있기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조에 다소 힘을 주어서 대답했지.
- 나약하다고요? 부탁이니 제발 외관에 구애받지 마십시오. 폭군의 무자비한 압박 속에서 허덕이던 국민이 분연히 일어나 쇠사슬을 끊었다면 당신은 이걸 보고 약하다고 하겠습니까? 집이 불길에 휩싸인 걸 보고 갑자기 몸 속의 힘이 분기해서, 보통 때 같으면 도저히 들 수 없을 무거운 짐을 너끈히 운반해내는 사람이라든지, 뜻밖의 모욕에 화가 치솟아 자기보다 힘센 상대를 순식간에 해치우는 그런 사람 역시 약한 것이 됩니까? 이봐요, 노력이 강인함이라면 어째서 과도의 긴장이 그 반대가 되는 겁니까?
 알베르트는 나를 바라보았다네.
- 당신이 드는 예는 이 경우에 조금도 해당되지 않는 것 같군요.
- 그럴지도 모르지요. 내 사고방식은 때로 터무니없다고 사람들로부터 자주 지적받으니까요. 즐거워야 할 인생이 무거운 짐이 되어 내던져 버릴 결심을 하는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지 한번 말해봅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공감하는 것에서만 어떤 사항을 논할 자격이 있으니까요. 인간의 본성에는 한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괴로움이든 어느 한도까지는 참을 수 있지만, 그것을 넘으면 인간은 바로 파멸해버리지요. 때문에 이 경우는 강한가 약한가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괴로움의 한도를 견딜 수 있는가 아닌가가 문제인 것입니다. -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말이죠. 그래서 나는 자살하는 사람을 비겁하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상한 논리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 대단한 역설이군요. - 하고 알베르트가 외쳤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네.
- 결코 지나친 역설이 아닙니다. 자, 보세요. 병 때문에 몸은 앙상해지고 정력이 다 소진되어 더는 일을 할 수 없는 데다, 아무리 좋은 치료를 받아도 생명의 순조로운 회복을 기대할 수 없게 된 경우, 이것은 죽을병이라고 해야 마땅하다는 건 당신도 인정하겠지요. 자, 이것을 정신에 적용해봅시다. 마음이 오그라들고 사물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해지고, 어떤 관념이 들어앉아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인간의 정열이 점차로 커져가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분별력이 뿌리채 뽑혀 파멸해가는 그런 인간이 있습니다. 침착하고 이성적인 사람은 그런 불행한 인간의 상태를 자세히 보고, 무언가 충고를 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건강한 사람이 병자가 누워 있는 옆에 서 있어봤자 자신의 넘쳐나는 힘을 손톱만큼이라도 나누어줄 수가 있겠습니까?

할머니의 말, 니체의 말

2015년 6월 16일 화요일 § 0



  머리가 복잡하면 유독 거실에서 멍 때리고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 같다. 평소에 워낙 조울증을 기본으로 장착하고 사는 사람이라, 내가 우울한건지 스트레스를 받는건지 몸이 안좋은건지도 구분하기 힘들때가 있다.
  요새 메르스 때문에 다들 걱정이 많다. 그래서 아버지는 혹여나 하는 마음에 할머니가 밖에 못 나가시도록 하고 있다. 할머니는 워낙 돌아다니시는 걸 좋아하시는 편이라 집에만 계시는 걸 너무나 답답해하셔서 내가 집에 있는 날이면 싱글벙글하시며 "뭐 먹고 싶니? 너라도 있으면 말동무가 되니까 좋다"고 하셨다.
  나는 가끔 주변 친구들에게 고민상담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을 때, 할머니께 조언을 구한다. 친구에게 먼저 물어봐서 해결이 안될 때나, 친구에게 물어봤자 답이 안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고민은 결국엔 할머니께 얘기하는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적기 뭣하니 그냥 넘어가고, 어떤 사람에 대한 질문이었다. 일단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얘기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보이는 그 사람에 대한 내용. 그런 내용들로 인해 마음속으로 강하게 흔들리는 나에 대한 질문.

  할머니는 아주 명쾌하게 대답하셨다.
  "넘(남)의 말 들을 필요 없어."
  "너랑 말이 잘 통하고 진실한 사람이 최고인거야."

  그리고 조금 뒤에
  "변덕 있는 사람이 사람도 잘 사귀는 법이야.
나는 변덕이 없어서 항상 어딜가도 사람을 잘 못 사귀었지."

첫 대답을 듣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너무 시원시원해서 였다.
진작에 할머니께 물어볼 것을 끙끙 앓고 있었던 것 같다.

할머니와 기분 좋게 냉면을 말아먹고, 책이나 한 권 읽으려 꺼내든 게 <니체의 말> 이었다.

나는 사실 얼마전까지 계속 기독교인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반종교적인 성향을 지닌 니체에 대해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단순하게 내가 가진 니힐리즘의 이미지와 결부시키며 막연하게 어두운 느낌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읽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던터에 돌아돌아 니체의 책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사버린 책이 '니체의 말'이었다. 사실 입문서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명언집이라고 해야할까. 그 정도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한 페이지마다 한가지 주제의 길지 않은 내용들이 적혀져 있고, 자신, 기쁨, 삶, 마음, 친구, 세상, 인간, 사랑, 지성, 아름다움이라는 열가지 큰 챕터로 구성되어있다.
책을 느리게 읽는 편인데도 단숨에 반을 넘게 읽어버릴 정도로 명쾌하게 쓰여진 글들이었다.

니체가 이런 말투를 가진 사람인지 몰랐다. 고작 명언집 200페이지 읽은게 다 이기때문에 섣불리 짐작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이제야 니체의 책을 살 용기가 들었다.

그 중에 90번 말이 앞서 할머니가 나에게 해주신 충고와 더해지면서 꽤 와닿았다.

90. 겉모습에 속지마라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진정 도덕적이라 단언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단순히 도덕에 복종하고 있는 것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스스로는 아무런 생각도 판단도 하지 않고 세상에 대한 체면 때문에 단순히 따르고 있거나, 자만심에 차 그 같이 행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기력감에 체념한 상태일 수도 있고, 다른 사고나 행동은 성가시다는 생각에 도덕적인 행동을 '그저'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도덕적인 행위 그 자체가 진정 도덕적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요컨대 도덕은 그 행위만으로는 진짜인지 아닌지를 좀처럼 판단할 수 없다.

내가 같이 보내는 시간동안 알게 된 그 사람에게 집중해야 하는 것이지, 잠깐 겪은 다른 사람의 안경을 통해 봐서는 안된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문구 같았달까.

사람들은 어떤 답을 찾으려고 책을 읽는다는 말이 있다. 평소 명언집 같은건 좋아하지도 않을 뿐더러 사본 적도 없는데, 자기가 찾는 답을 (그것도 내 마음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수 있는 답변) 빠르게 찾아내기에는 명언집 만한 것도 없는 것 같다.

두근두근 내 인생

2013년 6월 21일 금요일 § 0

  김애란 작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었다. 나는 다큐멘터리나 희귀병에 걸린 사람들 관련 뉴스 사진등을 많이 찾아보는 편인데 몇페이지를 읽자마자 머리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아름'이란 이름도 그렇고, 아름이에 대한 묘사도 내가 떠올린 그 얼굴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듯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아름이의 모든 행동서 부터 심지어 아름이의 집, 방배치까지 생생히 영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극중인물인 '아름'이가 '인간극장' 같은 느낌의 다큐멘터리에서 나왔던 사람이라고 확신했고,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다'는 글을 찾기 위해 몇 번이고 책 표지나 뒷 페이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인터넷검색을 해봐도 아무곳에서도 그런 부분은 찾을 수 없었고, 이건 그냥 소설이었다.


  문득 초등학교 때 장롱 위에서 태극기함을 꺼내다 발견한 아빠의 러브레터 뭉치가 떠올랐다. 20년도 더 전에 중매로 엄마를 만난 아빠는 첫눈에 맘에 들어 엄마를 졸졸 쫒아다녔다고 했다. 글씨는 너무 예뻤지만, 내용은 영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오늘도 이만 펜을 놓습니다' 같은 마지막 문구 정도만 떠오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할머니나 엄마, 아빠의 옛날이야기가 많이 듣고 싶어졌다. 내가 태어나기 전 그들의 이야기는 아는 게 어쩜 이렇게나 없는지 모르겠다. 며칠 뒤 귀국하면 꼭 옛날 얘기들을 많이 듣고 싶다.

  최근 기억의 왜곡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다. 처음 우리학교 입학 시험을 보던 날, 계단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던 것과 시험을 보러 계단 바로 정면에 위치한 방안으로 들어간 기억이 생생히 이미지로 간직되어 있었다. 그런데 3년이 지나고 그 날의 이미지를 다시 곰곰히 떠올려보니, 내가 열고 들어갔다고 생각한 문은 사실 계단의 정면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몇발자국 걸어가야 나타난다. 실제 문은 그 곳에 밖에 없는데 내 기억 속 문은 그 문이 아닌 것이다. 정말 별 것 아닌 일인데, 이상하게 자꾸 그 이미지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참 그럴싸한 말이다.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은 아직까지 해 본 적이 없는데, 요새 '아빠 어디가'라는 예능프로를 보며 언젠가 아이는 꼭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기 아빠와 쏙 빼닮은 구석들을 가진 아이들을 보면 자신의 기억나지 않는 잃어버린 유년시절을 찾는 기분이 들 것 같다. 그래서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엄마 아빠에게 둘 다 공평하라고.

Take this waltz 2011

§ 0

  영상이 너무 아름답지만 마음은 보는 내내 답답하게 했던 영화.
  마고는 브로셔 제작을 위해 간 여행에서 우연히 다니엘을 만나고 설레는 감정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녀에겐 오로지 그녀만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루가 있다. 아이는 없지만 그들은 이미 5년 차 부부이고 그녀는 이 관계를 깨고 싶지 않다. 다니엘에게 향하는 자신의 마음이 두려워 피하려고 해보지만 그녀의 모든 신경은 이미 그에게로 향하고 있다. 그럴수록 루에게서 설레는 감정을 찾고자 해도 이런 마고의 감정을 모르는 루는 이전처럼 한결같이 잔잔하게 그녀를 사랑한다. 결국 그녀의 마음이 완전히 다니엘에게 간 걸 알게된 루는 그녀를 보내 준다. 그리고 그녀는 다니엘에게로 달려간다.
  세 배우의 섬세한 감정표현이 그들의 상황을 꽤나 현실적으로 와닿게 해 마치 내 일인양 몰입하게 하고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는 답답한 느낌을 준 것 같다. 미셸 윌리암스가 마고역을 맡지 않았다면 이 영화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거의 완벽한 캐스팅이라고 하고 싶다.


  좀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마지막의 몇가지 장면이다. 불륜은 불륜이라지만, 마고는 다니엘을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억누르진 못해도(창문으로 그가 보이기만 해도 자기도 모르게 집 밖으로 달려나가려 하는 등) 그를 만나면 항상 마지막에는 이성을 찾으려 노력하고 밀어내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루가 직접 마고를 다니엘에게 보내주기 전까지 다니엘과 마고사이에 커다란 스킨쉽 씬은 없었다. 그런데 그 때문인지 참고 참았던 게 폭발하는 듯 막판에 둘의 애정씬이 마구마구 나오는데 여기서 너무 거슬렸던 건 두번정도 나왔던 쓰리썸 씬. 매우 쌩뚱맞거나 마고를 미친듯이 나쁜여자로 확 몰아가는 느낌이 뭔가 아쉬웠다. 저렇게까지 안보여줘도 충분히 알 것 같은데.

 그 밖에 수영장 샤워실에서 젊은여자들의 몸과 나이 든 여자들의 몸을 대비 시키며, 대화 내용에서까지 대비를 주는 장면이 있었는데, 흥미로웠지만 뭔가 뻔하게 그려진 것 같기도 해 조금 아쉬웠다.


2 Days in New York 2012

2013년 6월 20일 목요일 § 0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줄리 델피가 감독 겸 주연을 맡은 "2 Days in New York".  영화관에 상영중일때 보려고 벼르다가 너무 바빠서 못 보고 이제야 보게 되었다. 사실 이 영화가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의 속편인 줄은 모르고 봤는데, 줄리델피 아버지로 나오는 배우가 같은 배우인데다 몇몇 대사가 전편의 내용과 이어지기에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검색을 해보니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 오리지널 제목이 "2 Days in Paris" 였다.

  프랑스에 와서 살기 전에 이 영화를 봤으면 어땠을지 잘 모르겠지만, 어느덧 프랑스에 있은지도 몇 해가 흘렀고 저런 캐릭터들이 실제로 이곳에선 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참 공감하며 즐겁게 봤다. 엘리베이터에서 대마초를 피는 로즈의 모습은 며칠 전 내가 음악원에서 자리안내 아르바이트를 할 때 음악원 내부로 잎담배를 피며 들어오던 어느 아줌마를 떠오르게했다. 같이 일하던 프랑스친구들이 아주머니께 공연장내에서 흡연은 불가능하니 나가달라고 제지를 했고, 아줌마도 허허 웃으며 알았으니 다 피고 다시 오겠다고 대답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는 일은 아니라서 프랑스 친구들도 다들 헛웃음을 지으며, 저건 좀 심했다- 말도 안됀다 라고 말했지만, 이는 정말 프랑스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학교마다 다르겠지만 수업시간 중에 창문도 열리지 않은 교실에서 담배를 피는 아이들도 있고, 교수들도 수업 중간중간 담배를 핀다. 길을 걸으며 피우는 사람은 물론 여기저기 예상치못한 곳에서도 흡연자들은 출몰한다. 한국이었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그나저나 영화속에 마리옹(줄리델피)의 아버지 역할로 나온 배우의 이름이 '알베르 델피'인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익살스럽고 능글맞은 할아버지가 진짜 줄리델피의 아버지라니! 백발에 육중한 몸매를 가진 70살은 되어보이는 할아버지의 눈빛에 서린 장난끼가 사랑스럽게까지 느껴져 예사롭지 않았는데, 역시 줄리델피가 아버지의 미모와(젊었을 적 매우 미남이었다) 장난끼, 사랑스러움을 몽땅 물려받았나보다.

(너무 웃겼는데 야해보일 수도 있어서 작은 화면으로! 프랑스영화에서 가슴노출정도는 정말 별거 아니다.)

그 밖에 몇몇 장면은 조금 뻔하고 과장되게 그려낸 부분들도 있지만 오히려 이 과장을 통해 다른 나라 사람이 보면 단점이라고 느낄 수도 있는 프랑스인들의 여러 특징들을 어떤 애착을 담고 사랑스럽게 담아낸 듯한게 보여 기분이 좋았다. 나도 벌써 프랑스란 이상한 나라를 많이 좋아하게 되었나 보다. 나쁘게 보면 야만인처럼 보일 수도 있는 특징들이 사랑스러워 보이는 걸 보면.
 
줄리델피는 내가 정말 좋아한다고 할 수 있는 얼마 안되는 배우들 중 한 사람이다. 앞으로도 어떤 역할이든 어떤 내용이든 그녀가 출연했다거나 그녀가 만들었다고 하면 별 고민없이 그 영화를 볼 것 같다. 이유는 단지 그녀의 웃는 모습이 너무 좋고,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사상이나 삶을 대하는 태도 등 모든 것이 좋아서 이다. 말이 나온 김에 시간이 없어 못봤던 그녀의 초기작들도 다시 한번 체크해 봐야겠다.

Pornic 2013

2013년 6월 13일 목요일 § 0

 <croisement : 겹침 2>, 2013, 캔버스재질의 종이에 아크릴, acrylique sur papier toilé, 68x83 cm.


<une image capturée de video 'déjà devenir' d'Eder Lamoure>, 2013, Vidéo numérique. 


pornic, Eder et Benoit. février 2013 

 <images capturées de video 'Vue à vol de corbeau'>, 2013, Vidéo numérique.



2013년 2월 16일 토요일, 낭트에서 11시45분 발 Lila 버스를 타고 한시간 남짓 떨어져 있는 해변가 Pornic 에 다녀왔다. 함께 간 사람은 Eder와 Benoit. 목요일 저녁 에데르와 우연히 만나 'Je m'appelle Eric Satti' 라는 연극을 봤다. Eric satti의 아름다운 음악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연극은 꽤 맘에 들었고, 집으로 돌아가는 트람에서 에데르가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나도 바다에 안가본지 꽤 된터라 바로 다음 아침에 버스정류장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렇지만 버스 경로가 변경된 걸 모르고 엉뚱한 곳에서 한참을 기다리던 우리는 결국 바다에 가는건 실패하고 루아르 강 근처에서 맥주를 마시며 다음날을 기약했다. 그리고 토요일, 브누아까지 합세하여 결국 포르닉에 도착했다. 2월치고는 정말 따뜻한 날씨에, 과일가게에서 산 배는 과즙이 많고 그렇게 달 수가 없었다. 배를 한 입씩 베어 물으며 다가간 바다는 반짝반짝 그 자리에서 쭈욱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보였다. 우리는 각자 흩어져 어린아이라도 된 듯 바위 사이를 들여다 보거나 깨끗한 모래에 발자국을 내거나 가만히 앉아 파도소리를 들었다. 포르닉은 조그마한 여러가지 해변들이 많아 각각의 매력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그렇게 한참을 각자 돌아다니던 우리는 높고 넓직한 바위위에 앉아 에데르가 싸온 도시락을 먹었다. 친해진지 얼마 안됐기에 이렇게 엄마같은 아이일 줄은 몰랐다. 유럽사람이 싸온 도시락이 밥에 참기름과 숙주나물, 갖은 양념을 비빈 샐러드일 줄이야. 함께 가져온 빵은 수건에 세제가 묻어있었는지 냄새가 나서 다 먹지는 못했지만 후식으로 과일까지 싸온 그의 센스에 놀라고, 역시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맞는지, 배부르게 밥을 먹고 본 풍경은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위 그림은 내가 근래에 자주 그리는 '겹침(croisement)' 시리즈 중 하나인데, 포르닉에 다녀온 뒤 거기서 받았던 이미지를 담았다.

두번째 사진은 에데르가 찍은 비디오 déjà devenir 중 한 장면이다. 바닷물에 발을 담그려 양말을 벗고 있는데 갑자기 카메라를 들이대기에 쳐다봤는데 햇빛이 너무 강해 인상을 쓰는 모습으로 기억한다.

세번째 사진은 밥을 먹은 뒤 금새 다시 바다로 달려 간 두 갸르쏭의 모습.

네번째는 포르닉에서 찍은 사진들에 이상의 오감도 세번째시를 연결지어 만들어본 비디오의 장면 캡쳐 이미지.
(이상의 오감도로는 네개정도의 시리즈 비디오를 했었는데, 이번 것은 아직 미완성.)



(+ Eder Lamoure의 비디오 déjà devenir 링크
http://vimeo.com/63966681http://vimeo.com/639666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