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천명관 장편소설

2012년 8월 15일 수요일 § 0

고래 한 조각 2011




  작년 가을 2학년 1학기 첫 수업 때, 페인팅 교수님이 'A4'라는 주제를 준 적이 있다.
뭘 할까 망설이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고래 한 마리와 여자 한 명을 그렸었다.

  A0정도 크기 캔버스의 중심에 거꾸로 떨어지고 있는 금발의 여자를 그리고, 그 조금 위에 역시 추락하고 있는 고래 한 마리를 배치했다. 배경은 전부 하늘색이고 아랫쪽에는 조그맣게 에이포 용지 덩어리들 모양의 네모난 건물들을 그려넣었다.

  일주일짜리 과제였는데 6일 동안 고민하다 검사받기 전 날에야 캔버스에 붓을 댈 수 있었다. 하지만 크기가 크기인지라 스케치, 채색, 마무리까지 하는 데에 반나절로는 택도 없었다. 결국 검사 당일 날, 완성도도 없고 뭔가 상당히 애매한 그림을 내 놓게 되었다.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고 그 위에 실도 달고 이것저것 해봤지만 일단 내 마음에도 들지 않게 되어 버려서, 나는 내 차례가 오자마자 교수들 앞에서 '셀프 크리틱'을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있자니 내 작업을 잘 아는 한 교수가 슬그머니 내 편을 들어줬다. 너무 자신감 없어보이는 내가 안타까웠던 것 같다. 다른 교수에게 '이 아이는 작년에 꽤 큰 대회의 페인팅부문에서 상도 탔었고, 어떤 어떤 그림을 주로 그리고, 작업에 유머도 많이 들어있고 잘한다'는 식으로 얘기를 해 줬다. 프랑스 미술학교 학생들 스타일이 일단 무엇을 했든간에 '왜 했느냐' 하는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라 다들 결과물이 조금 구려도 '자기 변호'를 엄청나게 하는 편인데, 동양에서 온 이 쪼매난 여자애는 아시아 액센트가 섞인 불어로 실컷 셀프-어택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변호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나 보다.

  집에 오자마자 잔뜩 심술이 난 나는 그 그림을 가위로 16등분해 잘라버렸다. 교수님이 변호해 줄 때 더 울컥했던 거다. 난 어렸을 때 엄청난 울보였는데, 누가 위로하려 들면 "위로하지마. 그럼 더 운단 말이야." 하고 위로도 못하게 했다. 심지어 누가 안아주기라도 하면 끝도 없이 엉엉 울었다. 이제 엉엉 울기엔 나이를 조금 먹었으니 뭐라도 해야했다.

  그 이후, 16등분 되었던 그림 중 여자 부분은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라 사용되었지만, 고래는 제대로 완성도 안된채 눈 부분과 몸통 중간 부분 두 조각이 남았다. 버릴까하다가 연습장에 끼워두었다.



추락하는 여인 8조각 2011


  그렇게 약 1년이 흘렀고, 지인의 집 책꽂이에서 <고래>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천명관씨의 장편소설인 이 책은 제 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이었다. 은희경 씨 덕분에 문학동네소설상에는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데다가, 고래나 코끼리 같이 커다란 동물과 관련된 것들에 대해서는 그냥 못지나치는 나이기에 두툼한 책의 두께에도 불구하고 결국 집어들었다.

  이 책 속엔 다양한 형태의 '거대한 존재'들이 나온다. 고래, 코끼리, 덩치가 아주 큰 사람들. 이 들은 주로 아름답게 그리고 선망의 대상으로 표현되지만 극 중 모두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 금복이란 산골소녀가 바닷가의 한 도시로 내려와 처음으로 본 거대한 생명체, 장엄하고 아름다웠던 '고래'는 얼마뒤 부둣가에서 사내들의 칼로 해체되어 배에서 피와 내장을 잔뜩 쏟아내며 고깃덩어리로 변해버리고, 금복의 딸 춘희를 등에 태우고 마을을 두시간씩 산책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끌던 코끼리는 차 사고로 인해 긴 코에서 검붉은 피를 쿨렁쿨렁 쏟아내며 죽는다. 그리고 나중엔 금복의 주문에 의해 가죽만 벗겨내져 안에는 지푸라기만 잔뜩 들어있는 박제모형으로 변해 금복의 다방 앞 홍보 및 상징물로 쓰인다. 덩치 큰 사람들 : 금복의 첫사랑 걱정, 그의 딸 춘복, 춘복이 사랑하게 된 트럭 운전사 역시 모두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다. (사실 등장인물의 죽음에 대해 말하자면, 이 덩치 큰 세 사람을 제외하고도 모든 등장인물이 비극적으로 죽긴 한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은 그야말로 동물적이고 계산적이지 않은 순수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인간'이라기보다 고래나 코끼리와 다를 바 없는 순수한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고래나 코끼리의 이미지는 무언가 아득하고 슬픈 느낌을 지니고 있다. 각각 지상에서, 그리고 바다에서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위치했던 두 동물이지만 그보다 한 칸 위, 최정상에 서게 된 인간에 의해 멸종위기에 처해 버린 것 때문일까. 그 때문에 인간으로써 사라져가는 그들의 장엄한 아름다움에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일까.

  책 뒤 편의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질문자가 묻는다.
  "코끼리, 걱정, 고래, 춘희 등등. 이러한 사물이나 인물 들은 크다는 이유로 긍정적이고 의미있는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원시적인 활력, 원시적인 순수성에 대한 작가의 동경 때문이 아닌가"
  작가는 대답한다.
  "'큰 것에 대한 선망'에 대해 말하자면, 그런 동경보다도, 저는 오히려 그런 거대한 것의 비극성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아요. 거대한 육체가 덧없이 스러지고, 고래가 해체되어가고, 아까 제가 여학생 얘기도 했지만 거대한 육체 안에 깃든 비극성에 저는 더 이끌렸던 것 같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생명체가 크다는 것은 굉장히 비극적인 거죠. <원령공주>라는 일본 만화영화에 보면 무시무시하게 큰 동물들이 등장합니다. 그건 매우 아름답지만 그래서 더 비극적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상상력도 실은 매우 좁아지면서 세밀해지고 있는데 전 그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걸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 현대사회의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질서 속에서 거대한 정신과 그 아름다움이 스러져가는 데에 대한 애절함. 이 속엔 그런 게 있습니다."

  나는 평소 동물과 사람을 함께 그린 페인팅을 자주 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코끼리로 한 작업이 여러개 있다. 고래는 실제로 전체 모습을 본 적이 없어 그릴 엄두를 제대로 못내고, 시도를 해도 이내 실패하곤 했다. 하지만 고래 소리로 작업을 해보고 싶어 모아둔 사운드파일이 몇 개 있을 정도로 여전히 관심이 많다.
  한참 고래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보던 중에 흥미롭게 읽었던 칼럼을 링크해 둔다.

고래의 슬픈 노래 : http://www.freecolum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06
코끼리의 장례식 : http://www.freecolumn.co.kr/news/articleView.html?idxno=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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