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 은희경 장편 소설

2012년 8월 15일 수요일 § 0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보낸 혼란의 시기가 있었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만큼 사람이 변덕스럽고 바보같아지는 시기가 있을까? 난 이 시기에 참 바보 같았다. '그 사람과 나'의 관계에 대해 어떤 정의도 내릴 수 없는 상태였고, 그 사람도 나도 서로 호감이 있다는 정도 말고는 아무것도 확신이 없었기에 더 바보같이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평소 소심한 성격은 아닌데 이렇게 확신이 없는 경우에는 미친듯이 소심해진다. (어쩌면 내가 훨씬 많이 좋아한다고 생각했기에 조심스러웠던 것일수도 있다.) 그냥 작은 단서에도 잔뜩 설레여하지만 그 뿐이다. 내가 행동할 수 있는 권한 따위는 없다. 나의 소심함이 완벽하게 통제를 해주기에.

  그래서 매순간 보고싶어도 연락 한 통 할 수 없었다. 잡생각이 너무 많았기에 "할 수 없었던" 거다. 그런 내 자신이 너무 미웠다. 이 시기에 항상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 있다. "쿨하다. 이거." "쿨해보여요."
쿨해지고 싶었다. 그러면 내 감정도 맘껏 표현하고, 반응이 안좋아도 쿨하게 넘길수 있을테니까.
"이 사람은 아닌가? 별 수 없지 tant pis" 하고 말이다.

  그러던 중에 읽었던 책이다. 은희경 작가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사월 또는 오월의 어느 늦은 저녁이었다. 그 사람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안났다. 이전 번엔 이런 충동을 이기기 위해 영화를 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관계에서도 능동적인 역할이 되지 못하는데, 집에 가만히 앉아 노트북 모니터 속 영화 장면들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는 내 자신이 참 수동적이라 느껴졌고, 그 순간 영화보는 것도 참을 수 없이 지겨워졌다. 딴 생각도 자꾸 났고. 그래서 책을 집어들었다. 어려운 책은 집중이 안 될 것 같아 가벼운 사랑얘기를 읽고 싶었다. 제목과 첫 페이지를 읽었을 때의 느낌으로 '쉽게 읽힐 법한 연애소설 같다'해서 고른게 이 책이 었다. 예상대로 시간가는 줄 모르게 술술 읽히는 책이었지만 시간 때우기 용 그저그런 "연애소설" 느낌은 전혀 아니었다.

 이 책 속의 여주인공의 이름은 '진희'인데, 그녀는 참 쿨했다. 내가 되고 싶었던 '쿨한 여자'를 조금 지나친, 내 잣대로 평가하자면 과한 쿨함이었지만 그런 그녀의 성격이 극중 그녀를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처음 몇페이지를 읽자마자 지금의 나에게 힘과 도움이 되어줄 책이란 걸 느꼈다. 이 쿨한 여자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느끼고 조금만 더 쿨해지면 좋겠다 생각했다. 책을 다 읽어갈 수록 그런 생각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말이다.

  "쿨한 사람은 없다. 쿨한 척 하는 사람만 있을 뿐" 이란 말을 인터넷 서핑 중 어느 블로그에서 본 것 같다.
나는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아직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 진심으로 쿨하다고 할 만한 사람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완전히 반박할 수도 없다. 책을 읽다보니 쿨해보였던 진희도 결국 쿨한 척 하는 사람이었다.

  책 뒤편의 해설글 중 한 단락에선 주인공 '진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진희가 '보이고  싶어하는 나'는 애인이 많은  자유분방한 이혼녀, 남자를
쉽게 잊는 냉정한 여자, 육 년 동안이나 같이 산 남편과 이혼 수속을 마치고 와서도 보충수
업까지 하는 독한 여자, 사랑하면서도 헤어짐을 무릅쓰는 강한 여자이다. 그러나 진짜  나는
그리우면 몸을 던져 달려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다혈질의 여자,  올드 팝을 좋아하는 감상적
인 여자, 부딪쳐보기 전에 먼저 포기해버리는 비겁한 여자, 상처를 입으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빨리 대범한 척하는 소심한 여자이다. 이처럼 두 개로 분리된 그녀는 〈배트맨〉에 나오
는 조커 같다. 마스크를 벗으면 제 얼굴을 찾는 배트맨과는  달리 그는 화장을 해야 살색의
얼굴이 된다. 이런 조커의 최대 슬픔은 무표정해도 되는 배트맨과는 달리 자신의 비애를 감
추지 위해 웃기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울지 않기 위해 슬픔에 선수를 치면서 서둘
러 웃는다. 그래서 그의 웃음은 자주 일그러진다."

  난 원래 글을 자주 쓰던 사람이 아니기에, 책을 읽고 이 책은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는 건 너무 어렵게 느껴지고, 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내가 좋아했던 책을 읽은 뒤 한참 나중에야 알아챌 수 있는 '약간의 변화'에 대해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 이 소설을 읽은 이후 나는 '쿨해보여요.' '쿨하다.'라는 말의 사용을 거의 제로에 가깝게 줄였다. 아마 이 책이 내가 갖고 있던 쿨함에 대한 '동경'을 '동정'으로 바꾸어 놓지 않았나 싶다.
  쿨한 사람이 진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사랑은 너무 뜨겁다. 나도 함께 뜨거워질 각오를 하지 않고 쿨한 온도를 간직하려 든다면 사랑에 빠질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한 발자국 거리를 두려 들겠지.
  두번째 변화는 혼자 있을 때엔 술을 잘 마시지 않게 됐다. 기쁜 일이 생겨 맥주나 막걸리 한 캔으로 자축하는 정도를 제외하면, 힘든 일이 있을 때나 우울해서 마시고 싶을 때에도 혼자서는 꾹 참게 되었다. 이건 극 중에서 진희가 아이를 낙태시키고 애인과 헤어진 뒤 술을 사러가려다 마는 한 장면 때문이었다. 사실 책 읽는 내내 진희는 내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그렇지만 왜인지 모르게 이 부분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현석이 떠나버린 날 혼자서 술을 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했다. 꼭 그가 떠나서만도 아
니었다. 그 아이가 떠난 날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편의점으로 맥주를 사러 나가려고 의자에서 엉덩이를 뗀 순간 어떤 이유를 가지고
술을 마신다는 것이 더없이 약한 짓으로 생각되었다. 술이란 즐거울 때,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때 그냥 마시는 것이다. 슬프거나 괴로울 때 마시면  그것은 술이 아니라 슬픔과 괴로
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자기의 시간을 마시는 짓이다.  그래서 나는 도로 의자에 앉아
서 담배를 피웠다."

  책을 읽고나서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진희처럼 쿨하게 행동해볼까 하는 심산이었는지 몇 초 간의 고민도 없이 덜컥 통화버튼을 눌렀던 것 같은데, 역시 수화기 저편으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그냥 어버버 거리고 바보같은 말 몇마디 하다 끊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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