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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말, 니체의 말

2015년 6월 16일 화요일 § 0



  머리가 복잡하면 유독 거실에서 멍 때리고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 같다. 평소에 워낙 조울증을 기본으로 장착하고 사는 사람이라, 내가 우울한건지 스트레스를 받는건지 몸이 안좋은건지도 구분하기 힘들때가 있다.
  요새 메르스 때문에 다들 걱정이 많다. 그래서 아버지는 혹여나 하는 마음에 할머니가 밖에 못 나가시도록 하고 있다. 할머니는 워낙 돌아다니시는 걸 좋아하시는 편이라 집에만 계시는 걸 너무나 답답해하셔서 내가 집에 있는 날이면 싱글벙글하시며 "뭐 먹고 싶니? 너라도 있으면 말동무가 되니까 좋다"고 하셨다.
  나는 가끔 주변 친구들에게 고민상담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을 때, 할머니께 조언을 구한다. 친구에게 먼저 물어봐서 해결이 안될 때나, 친구에게 물어봤자 답이 안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고민은 결국엔 할머니께 얘기하는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적기 뭣하니 그냥 넘어가고, 어떤 사람에 대한 질문이었다. 일단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얘기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보이는 그 사람에 대한 내용. 그런 내용들로 인해 마음속으로 강하게 흔들리는 나에 대한 질문.

  할머니는 아주 명쾌하게 대답하셨다.
  "넘(남)의 말 들을 필요 없어."
  "너랑 말이 잘 통하고 진실한 사람이 최고인거야."

  그리고 조금 뒤에
  "변덕 있는 사람이 사람도 잘 사귀는 법이야.
나는 변덕이 없어서 항상 어딜가도 사람을 잘 못 사귀었지."

첫 대답을 듣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너무 시원시원해서 였다.
진작에 할머니께 물어볼 것을 끙끙 앓고 있었던 것 같다.

할머니와 기분 좋게 냉면을 말아먹고, 책이나 한 권 읽으려 꺼내든 게 <니체의 말> 이었다.

나는 사실 얼마전까지 계속 기독교인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반종교적인 성향을 지닌 니체에 대해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단순하게 내가 가진 니힐리즘의 이미지와 결부시키며 막연하게 어두운 느낌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읽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던터에 돌아돌아 니체의 책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사버린 책이 '니체의 말'이었다. 사실 입문서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명언집이라고 해야할까. 그 정도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한 페이지마다 한가지 주제의 길지 않은 내용들이 적혀져 있고, 자신, 기쁨, 삶, 마음, 친구, 세상, 인간, 사랑, 지성, 아름다움이라는 열가지 큰 챕터로 구성되어있다.
책을 느리게 읽는 편인데도 단숨에 반을 넘게 읽어버릴 정도로 명쾌하게 쓰여진 글들이었다.

니체가 이런 말투를 가진 사람인지 몰랐다. 고작 명언집 200페이지 읽은게 다 이기때문에 섣불리 짐작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이제야 니체의 책을 살 용기가 들었다.

그 중에 90번 말이 앞서 할머니가 나에게 해주신 충고와 더해지면서 꽤 와닿았다.

90. 겉모습에 속지마라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진정 도덕적이라 단언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단순히 도덕에 복종하고 있는 것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스스로는 아무런 생각도 판단도 하지 않고 세상에 대한 체면 때문에 단순히 따르고 있거나, 자만심에 차 그 같이 행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기력감에 체념한 상태일 수도 있고, 다른 사고나 행동은 성가시다는 생각에 도덕적인 행동을 '그저'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도덕적인 행위 그 자체가 진정 도덕적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요컨대 도덕은 그 행위만으로는 진짜인지 아닌지를 좀처럼 판단할 수 없다.

내가 같이 보내는 시간동안 알게 된 그 사람에게 집중해야 하는 것이지, 잠깐 겪은 다른 사람의 안경을 통해 봐서는 안된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문구 같았달까.

사람들은 어떤 답을 찾으려고 책을 읽는다는 말이 있다. 평소 명언집 같은건 좋아하지도 않을 뿐더러 사본 적도 없는데, 자기가 찾는 답을 (그것도 내 마음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수 있는 답변) 빠르게 찾아내기에는 명언집 만한 것도 없는 것 같다.

두근두근 내 인생

2013년 6월 21일 금요일 § 0

  김애란 작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었다. 나는 다큐멘터리나 희귀병에 걸린 사람들 관련 뉴스 사진등을 많이 찾아보는 편인데 몇페이지를 읽자마자 머리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아름'이란 이름도 그렇고, 아름이에 대한 묘사도 내가 떠올린 그 얼굴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듯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아름이의 모든 행동서 부터 심지어 아름이의 집, 방배치까지 생생히 영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극중인물인 '아름'이가 '인간극장' 같은 느낌의 다큐멘터리에서 나왔던 사람이라고 확신했고,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다'는 글을 찾기 위해 몇 번이고 책 표지나 뒷 페이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인터넷검색을 해봐도 아무곳에서도 그런 부분은 찾을 수 없었고, 이건 그냥 소설이었다.


  문득 초등학교 때 장롱 위에서 태극기함을 꺼내다 발견한 아빠의 러브레터 뭉치가 떠올랐다. 20년도 더 전에 중매로 엄마를 만난 아빠는 첫눈에 맘에 들어 엄마를 졸졸 쫒아다녔다고 했다. 글씨는 너무 예뻤지만, 내용은 영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오늘도 이만 펜을 놓습니다' 같은 마지막 문구 정도만 떠오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할머니나 엄마, 아빠의 옛날이야기가 많이 듣고 싶어졌다. 내가 태어나기 전 그들의 이야기는 아는 게 어쩜 이렇게나 없는지 모르겠다. 며칠 뒤 귀국하면 꼭 옛날 얘기들을 많이 듣고 싶다.

  최근 기억의 왜곡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다. 처음 우리학교 입학 시험을 보던 날, 계단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던 것과 시험을 보러 계단 바로 정면에 위치한 방안으로 들어간 기억이 생생히 이미지로 간직되어 있었다. 그런데 3년이 지나고 그 날의 이미지를 다시 곰곰히 떠올려보니, 내가 열고 들어갔다고 생각한 문은 사실 계단의 정면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몇발자국 걸어가야 나타난다. 실제 문은 그 곳에 밖에 없는데 내 기억 속 문은 그 문이 아닌 것이다. 정말 별 것 아닌 일인데, 이상하게 자꾸 그 이미지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참 그럴싸한 말이다.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은 아직까지 해 본 적이 없는데, 요새 '아빠 어디가'라는 예능프로를 보며 언젠가 아이는 꼭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기 아빠와 쏙 빼닮은 구석들을 가진 아이들을 보면 자신의 기억나지 않는 잃어버린 유년시절을 찾는 기분이 들 것 같다. 그래서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엄마 아빠에게 둘 다 공평하라고.

autoportrait 자화상

2012년 12월 6일 목요일 § 0

autoportrait, acrylic on papaer (march or april 2012~not finished)
자화상, 종이에 아크릴 물감 (2012 아마도 3-4월경의 어느날 시작, 아직 안끝남)



  삼 년 전쯤인가 자화상이라며 데상으로 그렸던걸 지난 봄쯤에 조금 크게 그려서 물감칠을 해뒀었다. 배경은 아이디어가 생기면 해야지..하고 내버려뒀던거. 결국 아직도 그냥 한구석에 버려져있다. 타지에 혼자 뚝 떨어져 외국인으로 살아가다보니 내 처지가 이렇게 느껴질때가 있다. 항상 불안정한 상태로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는 느낌. 의지할 부모님과 어떤 얘기이든 들어주던 오래된 친구들이 옆에 없어서인지 밖에서 받는 모든 영향은 혼자서 모두 소화한다. 한국에 있었다면 친구와 술한잔 마시며 지나칠 법한 안좋은 기억들도 여러번 곱씹어 소화하려 노력한다. 지금 이 힘든 시간들 하나하나가 거름으로 쓰여 후일에 자양분으로 쓰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래도 너무 힘들때가 있다. 그럴땐 역시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책과 좋아하는 작가의 작업을 보는 게 최고.


오늘은 웹에서 발견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명언들과 얼마전 읽었던 조정옥씨의 '나무가 내게 가르쳐 준 것들'의 한 구절 '고독하라'가 내게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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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목표도, 어떤 체계도, 어떤 경향도 추구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강령도, 어떤 양식도, 어떤 방향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일관성이 없고, 충성심도 없고, 수동적이다.
나는 무규정적인 것을, 무제약적인 것을 좋아한다.
나는 끝없는 불확실성을 좋아한다.”

 “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믿음을 가져야 하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내적으로 몰입해야 합니다. 그것에 한번 사로잡히면, 당신은 결국 회화를 통해 인류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어느 정도 믿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열정이 없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경우, 그냥 포기하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이죠. 왜냐하면 회화는 철저하게 바보 같은 짓이니까요.”
-게르하르트 리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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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고독하라.

  그대 집 한 채, 나무 한 그루, 그 어떤 생명의 흔적도 없는 어떤 낯선
별에서 홀로 사흘 밤낮을 헤매다가, 보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한 남자를
만났다면 아마도 그대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그를 필사적으로 부둥켜안을
것이다.

  발 시린 늦가을 고독이 마구 밀려오면 그대는 길 위에서 만난 그 누구와도
차 한잔을 나누고 그대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대화를 하고 싶어질 것이다.

  문 바깥 층계를 오르내리는 낯선 이의 발자국 소리에 그대 영혼은 반가움과
환희로 가득 차 전율하게 되고 문을 열고 뛰쳐나가 그의 뒤를 슬그머니 밟고
싶어질 것이다.

  고독은 호두알같이 단단한 그대 영혼을 열리게 하고 무표정 한 그대 얼굴에
웃음을 헤프게 한다. 그대는 잘 발효된 포도주처럼 거친 맛이 제거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담게 된다.

  고독, 얕은 고독이 아니라 가슴에 사무치는 고독은 인간을 인간답게 해준다.
고독하라.
  고독의 품에 그대를 맘껏 내던져라.

고래 / 천명관 장편소설

2012년 8월 15일 수요일 § 0

고래 한 조각 2011




  작년 가을 2학년 1학기 첫 수업 때, 페인팅 교수님이 'A4'라는 주제를 준 적이 있다.
뭘 할까 망설이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고래 한 마리와 여자 한 명을 그렸었다.

  A0정도 크기 캔버스의 중심에 거꾸로 떨어지고 있는 금발의 여자를 그리고, 그 조금 위에 역시 추락하고 있는 고래 한 마리를 배치했다. 배경은 전부 하늘색이고 아랫쪽에는 조그맣게 에이포 용지 덩어리들 모양의 네모난 건물들을 그려넣었다.

  일주일짜리 과제였는데 6일 동안 고민하다 검사받기 전 날에야 캔버스에 붓을 댈 수 있었다. 하지만 크기가 크기인지라 스케치, 채색, 마무리까지 하는 데에 반나절로는 택도 없었다. 결국 검사 당일 날, 완성도도 없고 뭔가 상당히 애매한 그림을 내 놓게 되었다.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고 그 위에 실도 달고 이것저것 해봤지만 일단 내 마음에도 들지 않게 되어 버려서, 나는 내 차례가 오자마자 교수들 앞에서 '셀프 크리틱'을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있자니 내 작업을 잘 아는 한 교수가 슬그머니 내 편을 들어줬다. 너무 자신감 없어보이는 내가 안타까웠던 것 같다. 다른 교수에게 '이 아이는 작년에 꽤 큰 대회의 페인팅부문에서 상도 탔었고, 어떤 어떤 그림을 주로 그리고, 작업에 유머도 많이 들어있고 잘한다'는 식으로 얘기를 해 줬다. 프랑스 미술학교 학생들 스타일이 일단 무엇을 했든간에 '왜 했느냐' 하는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라 다들 결과물이 조금 구려도 '자기 변호'를 엄청나게 하는 편인데, 동양에서 온 이 쪼매난 여자애는 아시아 액센트가 섞인 불어로 실컷 셀프-어택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변호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나 보다.

  집에 오자마자 잔뜩 심술이 난 나는 그 그림을 가위로 16등분해 잘라버렸다. 교수님이 변호해 줄 때 더 울컥했던 거다. 난 어렸을 때 엄청난 울보였는데, 누가 위로하려 들면 "위로하지마. 그럼 더 운단 말이야." 하고 위로도 못하게 했다. 심지어 누가 안아주기라도 하면 끝도 없이 엉엉 울었다. 이제 엉엉 울기엔 나이를 조금 먹었으니 뭐라도 해야했다.

  그 이후, 16등분 되었던 그림 중 여자 부분은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라 사용되었지만, 고래는 제대로 완성도 안된채 눈 부분과 몸통 중간 부분 두 조각이 남았다. 버릴까하다가 연습장에 끼워두었다.



추락하는 여인 8조각 2011


  그렇게 약 1년이 흘렀고, 지인의 집 책꽂이에서 <고래>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천명관씨의 장편소설인 이 책은 제 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이었다. 은희경 씨 덕분에 문학동네소설상에는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데다가, 고래나 코끼리 같이 커다란 동물과 관련된 것들에 대해서는 그냥 못지나치는 나이기에 두툼한 책의 두께에도 불구하고 결국 집어들었다.

  이 책 속엔 다양한 형태의 '거대한 존재'들이 나온다. 고래, 코끼리, 덩치가 아주 큰 사람들. 이 들은 주로 아름답게 그리고 선망의 대상으로 표현되지만 극 중 모두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 금복이란 산골소녀가 바닷가의 한 도시로 내려와 처음으로 본 거대한 생명체, 장엄하고 아름다웠던 '고래'는 얼마뒤 부둣가에서 사내들의 칼로 해체되어 배에서 피와 내장을 잔뜩 쏟아내며 고깃덩어리로 변해버리고, 금복의 딸 춘희를 등에 태우고 마을을 두시간씩 산책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끌던 코끼리는 차 사고로 인해 긴 코에서 검붉은 피를 쿨렁쿨렁 쏟아내며 죽는다. 그리고 나중엔 금복의 주문에 의해 가죽만 벗겨내져 안에는 지푸라기만 잔뜩 들어있는 박제모형으로 변해 금복의 다방 앞 홍보 및 상징물로 쓰인다. 덩치 큰 사람들 : 금복의 첫사랑 걱정, 그의 딸 춘복, 춘복이 사랑하게 된 트럭 운전사 역시 모두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다. (사실 등장인물의 죽음에 대해 말하자면, 이 덩치 큰 세 사람을 제외하고도 모든 등장인물이 비극적으로 죽긴 한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은 그야말로 동물적이고 계산적이지 않은 순수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인간'이라기보다 고래나 코끼리와 다를 바 없는 순수한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고래나 코끼리의 이미지는 무언가 아득하고 슬픈 느낌을 지니고 있다. 각각 지상에서, 그리고 바다에서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위치했던 두 동물이지만 그보다 한 칸 위, 최정상에 서게 된 인간에 의해 멸종위기에 처해 버린 것 때문일까. 그 때문에 인간으로써 사라져가는 그들의 장엄한 아름다움에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일까.

  책 뒤 편의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질문자가 묻는다.
  "코끼리, 걱정, 고래, 춘희 등등. 이러한 사물이나 인물 들은 크다는 이유로 긍정적이고 의미있는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원시적인 활력, 원시적인 순수성에 대한 작가의 동경 때문이 아닌가"
  작가는 대답한다.
  "'큰 것에 대한 선망'에 대해 말하자면, 그런 동경보다도, 저는 오히려 그런 거대한 것의 비극성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아요. 거대한 육체가 덧없이 스러지고, 고래가 해체되어가고, 아까 제가 여학생 얘기도 했지만 거대한 육체 안에 깃든 비극성에 저는 더 이끌렸던 것 같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생명체가 크다는 것은 굉장히 비극적인 거죠. <원령공주>라는 일본 만화영화에 보면 무시무시하게 큰 동물들이 등장합니다. 그건 매우 아름답지만 그래서 더 비극적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상상력도 실은 매우 좁아지면서 세밀해지고 있는데 전 그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걸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 현대사회의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질서 속에서 거대한 정신과 그 아름다움이 스러져가는 데에 대한 애절함. 이 속엔 그런 게 있습니다."

  나는 평소 동물과 사람을 함께 그린 페인팅을 자주 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코끼리로 한 작업이 여러개 있다. 고래는 실제로 전체 모습을 본 적이 없어 그릴 엄두를 제대로 못내고, 시도를 해도 이내 실패하곤 했다. 하지만 고래 소리로 작업을 해보고 싶어 모아둔 사운드파일이 몇 개 있을 정도로 여전히 관심이 많다.
  한참 고래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보던 중에 흥미롭게 읽었던 칼럼을 링크해 둔다.

고래의 슬픈 노래 : http://www.freecolum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06
코끼리의 장례식 : http://www.freecolumn.co.kr/news/articleView.html?idxno=6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 은희경 장편 소설

§ 0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보낸 혼란의 시기가 있었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만큼 사람이 변덕스럽고 바보같아지는 시기가 있을까? 난 이 시기에 참 바보 같았다. '그 사람과 나'의 관계에 대해 어떤 정의도 내릴 수 없는 상태였고, 그 사람도 나도 서로 호감이 있다는 정도 말고는 아무것도 확신이 없었기에 더 바보같이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평소 소심한 성격은 아닌데 이렇게 확신이 없는 경우에는 미친듯이 소심해진다. (어쩌면 내가 훨씬 많이 좋아한다고 생각했기에 조심스러웠던 것일수도 있다.) 그냥 작은 단서에도 잔뜩 설레여하지만 그 뿐이다. 내가 행동할 수 있는 권한 따위는 없다. 나의 소심함이 완벽하게 통제를 해주기에.

  그래서 매순간 보고싶어도 연락 한 통 할 수 없었다. 잡생각이 너무 많았기에 "할 수 없었던" 거다. 그런 내 자신이 너무 미웠다. 이 시기에 항상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 있다. "쿨하다. 이거." "쿨해보여요."
쿨해지고 싶었다. 그러면 내 감정도 맘껏 표현하고, 반응이 안좋아도 쿨하게 넘길수 있을테니까.
"이 사람은 아닌가? 별 수 없지 tant pis" 하고 말이다.

  그러던 중에 읽었던 책이다. 은희경 작가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사월 또는 오월의 어느 늦은 저녁이었다. 그 사람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안났다. 이전 번엔 이런 충동을 이기기 위해 영화를 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관계에서도 능동적인 역할이 되지 못하는데, 집에 가만히 앉아 노트북 모니터 속 영화 장면들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는 내 자신이 참 수동적이라 느껴졌고, 그 순간 영화보는 것도 참을 수 없이 지겨워졌다. 딴 생각도 자꾸 났고. 그래서 책을 집어들었다. 어려운 책은 집중이 안 될 것 같아 가벼운 사랑얘기를 읽고 싶었다. 제목과 첫 페이지를 읽었을 때의 느낌으로 '쉽게 읽힐 법한 연애소설 같다'해서 고른게 이 책이 었다. 예상대로 시간가는 줄 모르게 술술 읽히는 책이었지만 시간 때우기 용 그저그런 "연애소설" 느낌은 전혀 아니었다.

 이 책 속의 여주인공의 이름은 '진희'인데, 그녀는 참 쿨했다. 내가 되고 싶었던 '쿨한 여자'를 조금 지나친, 내 잣대로 평가하자면 과한 쿨함이었지만 그런 그녀의 성격이 극중 그녀를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처음 몇페이지를 읽자마자 지금의 나에게 힘과 도움이 되어줄 책이란 걸 느꼈다. 이 쿨한 여자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느끼고 조금만 더 쿨해지면 좋겠다 생각했다. 책을 다 읽어갈 수록 그런 생각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말이다.

  "쿨한 사람은 없다. 쿨한 척 하는 사람만 있을 뿐" 이란 말을 인터넷 서핑 중 어느 블로그에서 본 것 같다.
나는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아직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 진심으로 쿨하다고 할 만한 사람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완전히 반박할 수도 없다. 책을 읽다보니 쿨해보였던 진희도 결국 쿨한 척 하는 사람이었다.

  책 뒤편의 해설글 중 한 단락에선 주인공 '진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진희가 '보이고  싶어하는 나'는 애인이 많은  자유분방한 이혼녀, 남자를
쉽게 잊는 냉정한 여자, 육 년 동안이나 같이 산 남편과 이혼 수속을 마치고 와서도 보충수
업까지 하는 독한 여자, 사랑하면서도 헤어짐을 무릅쓰는 강한 여자이다. 그러나 진짜  나는
그리우면 몸을 던져 달려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다혈질의 여자,  올드 팝을 좋아하는 감상적
인 여자, 부딪쳐보기 전에 먼저 포기해버리는 비겁한 여자, 상처를 입으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빨리 대범한 척하는 소심한 여자이다. 이처럼 두 개로 분리된 그녀는 〈배트맨〉에 나오
는 조커 같다. 마스크를 벗으면 제 얼굴을 찾는 배트맨과는  달리 그는 화장을 해야 살색의
얼굴이 된다. 이런 조커의 최대 슬픔은 무표정해도 되는 배트맨과는 달리 자신의 비애를 감
추지 위해 웃기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울지 않기 위해 슬픔에 선수를 치면서 서둘
러 웃는다. 그래서 그의 웃음은 자주 일그러진다."

  난 원래 글을 자주 쓰던 사람이 아니기에, 책을 읽고 이 책은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는 건 너무 어렵게 느껴지고, 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내가 좋아했던 책을 읽은 뒤 한참 나중에야 알아챌 수 있는 '약간의 변화'에 대해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 이 소설을 읽은 이후 나는 '쿨해보여요.' '쿨하다.'라는 말의 사용을 거의 제로에 가깝게 줄였다. 아마 이 책이 내가 갖고 있던 쿨함에 대한 '동경'을 '동정'으로 바꾸어 놓지 않았나 싶다.
  쿨한 사람이 진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사랑은 너무 뜨겁다. 나도 함께 뜨거워질 각오를 하지 않고 쿨한 온도를 간직하려 든다면 사랑에 빠질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한 발자국 거리를 두려 들겠지.
  두번째 변화는 혼자 있을 때엔 술을 잘 마시지 않게 됐다. 기쁜 일이 생겨 맥주나 막걸리 한 캔으로 자축하는 정도를 제외하면, 힘든 일이 있을 때나 우울해서 마시고 싶을 때에도 혼자서는 꾹 참게 되었다. 이건 극 중에서 진희가 아이를 낙태시키고 애인과 헤어진 뒤 술을 사러가려다 마는 한 장면 때문이었다. 사실 책 읽는 내내 진희는 내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그렇지만 왜인지 모르게 이 부분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현석이 떠나버린 날 혼자서 술을 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했다. 꼭 그가 떠나서만도 아
니었다. 그 아이가 떠난 날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편의점으로 맥주를 사러 나가려고 의자에서 엉덩이를 뗀 순간 어떤 이유를 가지고
술을 마신다는 것이 더없이 약한 짓으로 생각되었다. 술이란 즐거울 때,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때 그냥 마시는 것이다. 슬프거나 괴로울 때 마시면  그것은 술이 아니라 슬픔과 괴로
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자기의 시간을 마시는 짓이다.  그래서 나는 도로 의자에 앉아
서 담배를 피웠다."

  책을 읽고나서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진희처럼 쿨하게 행동해볼까 하는 심산이었는지 몇 초 간의 고민도 없이 덜컥 통화버튼을 눌렀던 것 같은데, 역시 수화기 저편으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그냥 어버버 거리고 바보같은 말 몇마디 하다 끊었던 것 같다. 








Georges Bataille "Histoire de l'oeil" 조르주 바타유 - 눈 이야기

2012년 2월 23일 목요일 § 0


  파솔리니의 영화 "살로 소돔의 120일"을 봤을 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난 꽤 비위가 강한 사람인가 보다. 책을 많이 읽은 편은 아니지만 내가 여태까지 읽은 책중 가장 에로틱하고 변태적인 내용이었는데도 끝까지 읽은 걸 보면 말이다.

  처음 이 책을 읽고자 결심한 건 1학년 미술역사 수업 때 교수님이 이 저자의 이름을 몇 번 언급했기 때문인데, 무슨 내용에서 나왔는지는 기억도 나질 않는다. 어쨌든 이름을 기억해두고 있다가, 도서관의 정신•의학 서적 쪽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제대로 된 리뷰를 쓰려면 두어번 더 읽어봐야 할 것 같은데, 그럴 용기는 안난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다면, 루이 브뉴엘과 살바도르 달리의 단편 영화 "안달루시안의 개"에서 면도칼로 눈을 자르는 장면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나에게는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강렬한 장면이었고, 나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와 같은 장면이 이 소설 속에 있었다. (나는 면도칼과 같은 종류의 날카로운 것만 보면 그 장면을 떠올린다.) 소설 출판년도가 1928년 이고, 안달루시안 개가 1929년에 만들어졌으므로 이 책에서 그 장면을 따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확실치 않다. 어쨌거나 조르주 바타유는 초현실작가들과 어울려 다니며 저술활동을 펼쳤다고 하니, 구지 누가 먼저였는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은 2장으로 구성되는데, 1장이 13파트로 책의 90퍼센트를 구성하고, 2장은 몇페이지 분량의 짧은 글이 적혀있다. 2장에서 말하길, 실제로 저자의 아버지는 매독환자에 맹인이었고, 어머니는 우울증을 앓고 정신착란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런 극도로 불안한 가정환경을 혐오했다고 나와있다. 이 마지막 장에서 독자들은 1장에서 반복, 강조되는 "눈" 이라는 요소와 여러 강박적인 요소들이 그의 아버지와 그의 삶 자체에서 끌어져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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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이야기〉
〈눈 이야기〉는 1926년 바타유가 프랑스 작가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정신분석을 받고 난 후 '더 개방적이고 글을 더 잘 쓸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빠져 탈고한 첫 장편소설이다. 무(無)와 불결함 그리고 외설스러움에 대한 근본적인 갈망을 담은 이 소설 은 어쩌면 매우 강도가 높은 성(性) 입문의 이야기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러나 무시무시한 쾌락에 탐닉하는 화자와 시몬, 마르셸의 현기증나는 체험을 통해 바타유가 드러내고자 하 는 것은 인간의 내면 깊숙이 드러워진 강박에 다름아니다. 작가 자신 불우한 어린 시절에 생겨난, 뿌리깊은 강박. 바타유의 모든 저작에 등장하는 강박적인 요소들(성(聖), 에로티즘, 죽음, 불가능)은 이 작품을 통해 자유롭게 비약하기 시작한다. ·
제1장 이야기 : 1. 고양이의 눈 - 열여섯 살의 화자는 시몬을 만난다. 그들 은 함께 성적 유희에 탐닉하고, 자신들이 몰던 자동차에 치여 죽은 한 소녀를 바라보며 쾌 감을 느낀다.
2. 노르망디의 장롱 - 그들은 내성적이고 순진하며 독실한 마르셸을 자신들의 유희에 끌어들인다. 시몬은 '엉덩이로 달걀을 깨는 기벽'을 갖게 되고, 샴페인을 마신 마르 셸은 성적(性的) 경련을 일으키지만, 청소년들의 부모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쫓아내는 바람 에 화자는 그 순간을 이용할 수가 없다.
3. 마르셸의 냄새 - 화자는 시몬 집으로 피신한다. 파티가 끝난 뒤 요양원에 갇힌 마르셸 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힌 시몬과 화자는 마르셸 없이는 사랑을 나누지 않기로 한다.
4. 태 양의 흑점 - 그들은 요양원에 가지만 친구를 탈출시킬 수가 없다. 하지만 창문 뒤에 서 있 던 마르셸은 잔디밭에서 자위행위를 하는 시몬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한다.
5. 핏줄기 - 그 들은 시몬 집으로 돌아간다.
6. 시몬 - 그들은 여기서 6주 동안 머무른다. 그리고 그 동안 마르셀을 어떻게 해야 될지 상상하며 달걀을 가지고 논다.
7. 마르셸 - 결국 요양원에서 도 망치는 데 성공한 마르셸은 '단두대의 신부인 추기경'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해달라고 그들 에게 부탁하는데, 이 추기경이란 파티를 하던 도중에 그녀가 스스로 틀어박혀 있던 장롱에 서 그녀를 끄집어낸 화자에 대한 흐릿한 기억에 다름아니다.
8. 죽은 여자의 떠 있는 눈 - 화자의 집에 온 마르셸은 목을 맨다.
9. 음란한 동물들 - 다음날 화자와 시몬은 스페인으로 가서 영국인 백만장자인 에드먼드 경을 만난다.
10. 그라네로의 눈 ∼ 11. 세비야의 태양 아래서 - 에드먼드 경은 두 사람을 투우 경기장에 데려가고, 투우 경기가 벌어지는 동안 시몬은 황소의 생불알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한다. 그녀는 이 불알을 가지고 성적 유희를 벌 임으로써 마르셸의 이미지를 되살린다.
12. 시몬의 고해와 에드먼드 경의 미사 - 세비야의 한 성당에서 시몬은 고해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녀는 고해신부의 목을 졸라 죽인다.
13. 파리의 다리들 - 시몬은 고해신부의 눈알을 파내서 황소불알을 그렇게 했던 것처럼 엉덩 이 사이에 집어넣고 논다. 제2장 일치들 : 저자는 앞의 이야기를 해석하면서 아버지의 실명(失明)과 어머니가 목 매단 일을 회상한다.
〈눈 이야기〉에서 그려지는 모든 것들은 바로 그 시절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개인사적으로, 나아가 사회적으로 동요와 폭력의 시대에 태어난 이 작품에는 니체적 비 관론이 짙게 깔려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들은 1957년 출판된 〈하늘의 푸른 빛〉에서 좀더 과격하고 선명한 형태로 변주된다.
출처 : 눈 이야기 - 조루주 바타유|작성자 물과꿈의 글검색

김영하 "빛의 제국"

2012년 2월 21일 화요일 § 0



  읽고 난 뒤에 여운이 좀 컸다.
  고작 2년 반. 한국에서 13시간 걸리는 먼 나라에 혼자 뚝 떨어져 지낸 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상황은 완전히 다르지만, 소설 속 주인공인 북한에서 교육받아 남파된 '기영'은 "이방인"이라는 점에서 외국 유학생의 삶과도 꽤 잘 맞아 떨어진다.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처음 읽었을 때, 주인공이 나와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뭔가 좀 씁쓸했던 기억이 있는데, "빛의 제국"을 읽을 때에도 뭔가 비슷한 종류의 감정을 느꼈다. 책은 참 좋았지만 마음이 참 싱숭생숭하다.

 책의 표지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선택한 것에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낮의 밝고 푸른 하늘에 대조적으로 말도 안되게 어두운 대지의 풍경. 마치 소설을 읽고 그에 맞춰 주문된 일러스트 이미지 처럼 소설의 분위기를 깔끔하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매미하고 슬프다이. 나는 매미하고 슬프다이."
  철수는 할머니가 유난히 매미의 울음을 무서워한다고 생각해왔었다. 그러나 사실은 가여워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문법은 틀려도, 아니 어쩌면 틀렸기 때문에 더더욱 할머니의 슬픔이 손실 없이 철수의 심장으로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것은 슬픔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비통한 것이어서 어린 철수는 그것의 무게를 몸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정말 할머니의 슬픔이 감자 자루처럼 어깨와 등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그는 어서 아버지가 내려와 자기를 데려가주기를 기도하며 잠이 들었다.


  221페이지, 철수의 할아버지가 죽었을 때 할머니가 슬퍼하는 대목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대목이 제일 와닿았던 부분이었다.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에서 "설렁탕을 사왔는데 왜 먹지를 못해.." 라고 말하던 부분 이후로, 그만큼 슬퍼하는 이의 감정을 강하게 전달하는 표현을 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그 대목을 읽을 때 만큼의 진한 여운을 느꼈고, 이 "매미하고 슬프다이"하는 표현에서 형성되는 청각적이며 시적인 어떤 분위기는 참 묘하면서 짠하고, 또 아름답게 느껴졌다.

"À la couleur" Jan Voss

2012년 2월 15일 수요일 § 0


최근에 도서관에서 빌려본 책 중 하나.
Jan voss 라는 아티스트의 에세이 "À la couleur"이다.
다양한 주제의 짧막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의 아뜰리에 사진이라던가 그의 작업들도 볼 수 있어 시간 날 때 틈틈히 읽기에 좋았다.

사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책 곳곳에 그려져 있는 아기자기한 낙서들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아티스트 데이비드 슈링글리도 떠오르고, 이런 그림은 무슨 생각으로 그릴까 하는 궁금증도 생기고 해서 바로 집어 들었다. (책을 다 읽고보니 그는 데이비드 슈링글리와는 매우 다른 스타일의 작업을 한다.)

책 또는 웹서치에서 알게 된 몇가지 사실은, 그가 현대 미술사에서 꽤 잘 알려진 아티스트라는 점. 1936년도에 함부르그에서 태어나 현재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파리의 현대미술관에서 1978년에 이미 회고 전시도 가졌었다는 것. 그리고 1987년부터 1992년까지는 파리의 국립미술학교 에꼴 나쇼날 슈페리에흐 데 보자르에서 교수직으로 있었다는 점이다.

미술을 공부 하는 사람으로서 또는 페인팅을 하는 사람으로서 아티스트의 글을 읽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다. 게다가 이 작가가 독일에서 태어나 나중에 불어를 배운 사람이었기 때문인지 문장구조가 참 단순해서 외국인 또는 불어 초심자들이 읽기에 무리가 없어 보인다.
책 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불어 실력이 완벽하지 않을 때를 회상하며 그때의 불완전성을 약간은 그리워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데 이 대목은 공감이 정말 많이 갔다. 나에게 불어는 아직도 상당히 불분명한 느낌이지만 그래도 처음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와 비교하면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얇은 비닐 천막으로 가려진 세상을 부유하다가, 조금씩 조금씩 천막을 벗겨내고 현실을 마주하는 느낌이랄까. 사실 안개낀 세상속의 생활은 불편하기도 하겠지만, 개인의 차이에 따라 맑게 개인 날보다 훨씬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다.

  그 밖에 작가의 독특한 사고방식 및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점 역시 볼 수 있는 몇가지 일화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작가가 일본에 갔을 때 신발을 벗어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발을 "이성 유혹의 수단"이라고 생각해 왔던 그에게 신발을 벗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작가는 양말을 신고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그의 친구들의 권유에 못이겨 신발을 벗고 실내로 들어오게 된다. 발가벗겨진 듯한 그의 심정과는 다르게 친구들은 그의 발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는 안도감과 함께 어떤 실망감을 느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두번째로 첨부한 사진속의 텍스트는 정말 귀엽다고 느꼈는데, 책 분위기 자체가 이런 분위기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이 글은 글을 읽고 텍스트 옆의 이미지를 바라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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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사진 속 텍스트.


"Reproche"
Quelque chose de bizarre en rentrant, comme une présence. Mais il n'y a personne  évidemment. Comment d'ailleurs quelqu'un aurait-il pu entrer? Je me mets à inspecter les lieux plus attentivement. Sur la table, des crayons éparpillés, des feuilles de papier de différents formats entassées par petits tas séparés, des pots de yaourt sevrant de récipients d'eau, des pinceaux et autres outils, non, vraiment rien à signaler. Mais si, il y a une minuscule trace brillante, là, comme celle d'un petit escargot. Elle va de la pointe d'un pinceau vers une aquarelle que j'ai abandonnée cet après-midi. La ligne, un peu hésitante et ondulante, s'arrête sur la petite feuille et je vois que deux yeux me regardent avec reproche.

"비난"
  무언가 이상한 것이 들어오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곳엔 당연히 아무도 없다. 그래, 누가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겠는가? 나는 이 장소들을 좀 더 조심스럽게 검사하기 시작한다. 테이블 위, 흩어져있는 크레용들, 작은 무더기로 분리되어있는 다양한 포맷의 종이장들, 물통처럼 쓰이던 요거트 그릇들, 여러자루의 붓, 그 밖의 도구들. 음 아니야. 역시 눈에 띄는 특별한 것은 없다. 아, 여기 뭔가 있다. 여기 이 빛나는 작은 자국, 작은 달팽이의 자국같은 것. 그것은 붓의 끝부분에서 내가 오늘 오후에 아무렇게나 내버려둔 수채화를 향해 가고 있다. 약간은 망설이는 듯한 구불구불한 이 선, 이는 어떤 작은 종이 위에 멈춘다. 그리고는 나를 비난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위의 사진을 보세요.




Sophie Calle "Les aveugles"/ 소피칼 "맹인들"

2012년 2월 11일 토요일 § 0

Sophie Calle
"Les aveugles"
Beau livre (broché). Paru en 11/2011
79 euro



  최근에 몇가지 일을 보러 나왔다가 다음 약속시간까지 1시간이 남았던 날이 있다.
그 날, 시간을 때우러 서점에 갔었다. 요즘엔 항상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던 터라 꽤 오랜만의 서점 방문이었다. 2층에서 새로나온 음반들을 조금 둘러보다가 이내 예술서적 코너로 걸어갔다. 마침 신간란에 소피 칼(Sophie calle)의 Les aveugles(맹인들)이란 책이 있었다. 얼마전의 그녀의 오래된 책 중 하나인 Les histoires vraies 를 읽었기도 하고, 형광 노란색의 깔끔한 책 표지가 정말 예쁘기도 해서 바로 집어들었다.

  책은 세 가지 질문에 따른 테마로 나뉘어 있었다. 처음 부분에선, 선천적으로 시각장애를 갖고 태어나 한번도 세상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당신에게 아름다움이란"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걸로 시작되었던 것 같다. 질문과 함께 첫 페이지가 시작되고, 맹인들의 포트레이트, 그리고 그들의 대답, 그들의 대답을 소피칼이 사진으로 표현한 것들이 차례로 이어진다. 각각의 파트는 점자로 새겨진 페이지가 추가되어 맹인들 역시 읽을 수 있게 제본되어 있었다.
두번째 파트는 나중에 시력을 잃은 후천성 시각장애인들에게 "마지막으로 본 가장 아름다웠던 것"을 물어봤던 것 같다. 이 역시 위와 같은 방식으로, 사진과 글, 점자로 번역된 페이지로 구성된다.
세번째는 유명한 아트작품의 크리틱을 읽게하고 그 작업에 대해 상상하거나 느낀 것이었던가. 세번째 파트를 읽기 시작한 지 조금 뒤 핸드폰이 울렸다. 벌써 약속시간 10분 전 이었다. 아쉽지만 바로 책을 덮고 서둘러 약속장소로 가야했기 때문에, 세번째 파트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마음만 같아서는 책을 사들고 서점을 나서고 싶었지만, 책 가격이 79유로였다. 한국돈으로 12만원정도이다. 솔직히 그 만큼의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느꼈지만, 학생으로선 당연히 망설여지는 가격이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사두고 싶다.

아쉬운 마음을 다잡고 서점을 나섰지만, 손끝에는 점자책의 점자를 만지던 느낌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듯했다. 나는 점자를 읽는 법은 모르지만, 책의 3분의2 정도를 읽는 내내 점자를 읽듯 책을 더듬더듬 만지며 읽어보았다. 그들의 인터뷰 내용을 본따 소피칼이 찍은 사진들 역시 트래싱지에 인쇄되어 있어서 그런지 만질 때에 약간의 질감이 느껴졌다. 잘은 모르겠지만 책 안에 온통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이 책 안의 작업들은 '맹인들'이라는 제목으로 몇차례 전시 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쉽게 자료를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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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과는 무관한 내용이지만, 점자에 대해 찾아보다가 재미있는 광고영상을 발견했다.
햄버거 빵 위에 붙어있는 깨들을 점자모양으로 붙혀서 구웠는데 이는 시각장애인들도 자신이 먹는 음식을 알고 먹을 권리가 있다는데서 아이디어가 나온 것 같다. 다들 점자 글을 읽고 환한 미소를 짓는데 그 모습이 참 아름다워보였다.